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자유의 이면에는 어두운 일제강점기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혹시 독립운동가들이 서로 다른 생각과 이념을 가지고 치열하게 대립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1920년대 조선의 독립운동 전선은 큰 위기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나라를 되찾겠다는 목적은 같았지만, 자본주의 체제를 지향하는 민족주의 계열과 노동자와 농민의 세상을 꿈꾸는 사회주의 계열이 서로를 불신하며 갈라섰기 때문입니다. 마치 평행선처럼 절대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던 이 두 세력이 일제의 혹독한 탄압 속에서 손을 잡았던 기적 같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민족 협동 전선이었던 신간회의 탄생입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오직 조국 독립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위해 하나가 되었던 그 뜨거웠던 순간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일제의 민족 분열 통치와 기만적인 문화 통치의 실상
1919년 전 민족이 하나 되어 외쳤던 3일 운동은 일제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거센 저항에 깜짝 놀란 일제는 기존의 강압적인 무단 통치로는 조선을 지배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따라 일제는 이른바 문화 통치라는 새로운 간판을 내걸었습니다.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일부 허용하고 조선인 관리를 채용하는 등 겉으로는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이는 조선 민족을 효율적으로 기만(남을 속여 넘김)하기 위한 고도의 책략이었습니다. 일제의 진짜 목적은 독립운동 세력을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누어 서로 싸우게 만드는 민족 분열에 있었습니다. 실제로 일제는 친일파를 조직적으로 육성하고 민족주의 운동 세력 내부에 타협의 미끼를 던졌습니다. 이러한 일제의 교활한 통치 방식은 독립운동 전선에 커다란 균열을 가져왔고, 우리 민족 내부에서 사상적 갈등이 깊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민족주의 진영의 분열과 타협적 자치론의 대두
일제의 문화 통치가 지속되면서 민족주의 진영 내부에서는 심각한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광수와 최남선 등을 중심으로 한 일부 민족주의자들은 일제의 지배를 인정하는 투항주의(싸우지 않고 상대방에게 굴복하여 항복하려는 태도)적 성향을 보였습니다. 이들은 당장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불가능하니, 일제가 허용하는 틀 안에서 실력을 키우고 자치권이라도 얻어내자는 타협적 자치론을 주장했습니다. 이 주장은 사실상 일제의 식민 지배를 인정하고 타협하겠다는 변절에 불과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안재홍, 신석우 등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자치론자들을 강하게 비판하며 일제와의 어떠한 타협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만으로는 일제의 탄압과 자치론자들의 공세를 막아내기에 역부족이었고, 이들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사회주의 사상의 확산과 정우회 선언의 결정적 계기
한편 1920년대 조선에는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급격하게 확산되고 있었습니다. 청년과 지식인, 그리고 전국의 노동자와 농민들이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초기 사회주의 진영은 자본가 계급을 대변하는 민족주의 진영을 부르주아지(자본가 계급을 이르는 말)라 부르며 극도로 경계하고 배척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혹독한 치안유지법 제정과 탄압으로 사회주의 운동 역시 큰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내부적인 분열과 일제의 검거 열풍 속에서 사회주의 진영은 민족주의 세력과의 연대 필요성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고민 끝에 1926년 11월, 사회주의 단체인 정우회가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정우회 선언은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이 타협적 자치론자들과 싸우고 있다면, 그들과 손을 잡고 공동의 적인 일제에 맞서야 한다는 대전환의 메시지였습니다. 이 정우회 선언은 좌우 합작 독립운동 단체가 탄생할 수 있는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좌우 합작의 결실 신간회의 엄숙한 창립과 강령
비타협적 민족주의 진영의 결단과 사회주의 진영의 정우회 선언이 맞물리면서 1927년 2월 15일, 마침내 서울 YMCA 회관에서 신간회가 역사적인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신간회라는 이름은 새롭게 피어나는 줄기라는 뜻으로, 민족의 새로운 희망이 되겠다는 굳은 의지를 담았습니다. 회장에는 대중적 신망이 높았던 이상재가 추대되었고, 부회장에는 홍명희가 선출되는 등 좌우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대거 참여했습니다. 신간회는 세 가지 핵심 강령을 발표하며 단체의 갈 길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첫째는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한다였고, 둘째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였으며, 셋째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구한다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회주의는 바로 일제와 타협하려 했던 자치론자들을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사상과 이념의 장벽을 뛰어넘어 오직 국권 회복을 위해 하나가 된 순간이었습니다.
전국의 민중과 함께한 신간회의 활발한 구국 활동
신간회는 창립 이후 무서운 속도로 교세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전국의 중소 도시와 농촌 지역까지 지회가 설립되었으며, 심지어 일본 도쿄를 비롯한 해외에도 지회가 만들어졌습니다. 전성기에는 회원 수가 수만 명에 달할 정도로 일제강점기 국내 최대 규모의 합법적 독립운동 단체로 성장했습니다. 신간회는 단순히 성명서를 발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민중의 삶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각 지역에서 강연회를 개최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생각이나 기운을 한껏 떨치고 북돋움)시켰고, 야학을 개설하여 까막눈이었던 민중들에게 글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일제의 악랄한 수탈에 신음하던 노동자와 농민들의 생존권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1929년 원산 총파업이 일어났을 때는 노동자들을 위한 성금을 모금하고 격려문을 보내는 등 대중 운동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과 신간회의 역사적 총력 투쟁
1929년 11월, 전라도 광주에서 한일 학생 간의 충돌로 시작된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신간회의 활동이 정점에 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제 경찰이 일본인 학생 편만 들며 조선인 학생들을 부당하게 처벌하자, 신간회는 이를 단순한 학생들의 싸움이 아닌 민족 차별의 문제로 인식했습니다. 신간회 중앙본부는 즉시 조사단을 광주로 파견하여 진상을 파악하고, 이를 전국적인 반일 운동으로 확산시키기 위한 대규모 민중 대회를 계획했습니다. 서울에서 전 민족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를 일으켜 일제의 식민 통치에 정면으로 도전하려 했던 것입니다. 비록 대회가 개최되기 직전 일제 경찰의 사전 검거로 조병옥, 허헌 등 신간회의 핵심 간부들이 대거 체포되면서 계획은 좌절되었지만, 이 사건은 신간회가 민족의 고통 앞에 언제나 앞장섰던 행동하는 단체였음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이념의 벽과 일제의 탄압 속에 찾아온 아쉬운 해소
광주 학생 항일 운동 이후 신간회는 일제의 집중적인 감시와 탄압을 받으며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핵심 지도부가 체포된 공백을 틈타 온건파 지도부가 들어서면서, 신간회 내부에서는 일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합법적인 활동만 하자는 주장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이에 사회주의 진영은 신간회 지도부가 기회주의 노선으로 변질되고 있다며 강력하게 반발했습니다. 더욱이 당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흐름이 부르주아지와의 협력을 중단하라는 방향으로 바뀌면서, 사회주의자들은 신간회의 해체, 즉 해소론을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해소란 단체를 단순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더 발전적인 대중 운동을 위해 조직을 발전적으로 해체한다는 명분이었습니다. 결국 좌우 진영 간의 대립이 다시 격화되면서 1931년 5월 전체 대회를 끝으로 신간회는 공식적으로 해소되었습니다. 비록 아쉬운 종말을 맞이했지만, 사상을 초월하여 민족이 하나 되었던 신간회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에게 연대와 화합이라는 위대한 교훈을 남겨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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