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선 개헌의 무리수 장기 집권을 향한 박정희 정부의 독주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박정희는 헌법상 더 이상 대통령에 출마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의 중임을 단 한 차례로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과 이 년 뒤 대한민국은 다시 개헌이라는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됩니다. 헌법이 정한 임기의 한계를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시도가 시작된 것입니다. 여당 의원들이 야당 몰래 국회 별관에 모여 단 몇 분 만에 헌법을 바꿔버린 그날의 사건은 이후 한국 현대사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를 예고하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히 한 정치인이 임기를 한 번 더 연장한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대학과 고등학교 교정을 뒤덮은 시위대의 함성 여당 내부에서조차 터져 나온 반발 그리고 새벽 시간 은밀하게 이루어진 국회 표결까지 이 사건의 전개 과정 하나하나가 이후 한국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를 말해주는 축소판이었습니다. 왜 박정희 정부는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개헌을 밀어붙였을까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어떤 상처를 입게 되었을까요

강력한 리더십이라는 명분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상당한 표차로 윤보선을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헌법 제69조 3항은 대통령이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곧 1971년 선거에는 박정희가 출마할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헌법의 테두리 안에서 계속 집권하려면 남은 길은 하나뿐이었습니다. 바로 헌법 조항 자체를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1969년 초부터 여당인 민주공화당 내부에서는 개헌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당 사무총장이 헌법의 미비점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던졌고 뒤이어 윤치영 당의장서리는 강력한 리더십이 있어야 조국 근대화와 조국 중흥이라는 민족적 과업을 완수할 수 있다는 논리를 앞세웠습니다. 북한의 도발 위협 속에서 정치적 안정을 극대화하려면 박정희의 지속적인 지도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들이 내세운 명분이었습니다. 이 발언이 알려지자 야당인 신민당은 곧바로 반대 입장을 발표했고 여당 내부에서도 찬반 양론이 엇갈리며 전국적인 논란으로 번져나갔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박정희 본인이 초반에는 다소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한 기자회견에서 지금은 개헌을 논의할 시기가 아니라며 논의 중지를 지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여론의 반발을 가라앉히기 위한 일시적인 제스처에 가까웠고 이후 상황은 개헌을 향해 착실히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해 말 재선거가 치러진 나주에서 야당 총재는 여당이 장기 집권을 위해 삼선 개헌을 시도하고 있다고 정면으로 공박하며 야당 후보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논의를 유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물밑에서는 개헌을 향한 정치적 준비가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던 셈입니다.

여당 내부의 반발은 왜 힘을 얻지 못했을까요

3선 개헌에 반대한 것은 야당만이 아니었습니다. 여당인 민주공화당 내부에서도 상당한 저항이 있었습니다. 특히 당시 유력한 차기 주자로 거론되던 김종필과 그를 따르던 세력은 개헌에 부정적이었습니다. 자신들의 정치적 미래가 걸린 문제였던 만큼 이들의 반발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를 정점으로 한 권력 집단은 이러한 저항을 차례로 무력화시켜 나갔습니다. 1968년에는 국민복지회 사건이라는 명목으로 김종필계 인사들이 정치적 타격을 입었고 1969년에는 이른바 사일팔 항명 파동을 거치며 개헌에 비판적이던 여당 내 세력이 결정적으로 힘을 잃게 됩니다. 이 사건들을 거치며 여당 내부에서 개헌을 공개적으로 반대할 수 있는 목소리는 사실상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해 7월 8일 대학들이 방학에 들어가자마자 여당은 기다렸다는 듯 대통령의 3선 연임과 국회의원의 국무위원 겸직을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정식으로 발의했습니다. 학생들의 시위가 개헌 논의를 지연시키는 주요 변수였던 만큼 방학 시점을 노린 발의였다는 해석이 지금까지도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거리와 교정을 뒤덮은 개헌 반대의 함성은 어떻게 퍼져나갔을까요

개헌 논의가 본격화되자 가장 먼저 거리로 나선 것은 대학생들이었습니다. 1969년 6월 중순부터 서울 지역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성토대회와 시위 그리고 농성이 이어졌고 이 흐름은 빠른 속도로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정부와 학교 당국은 휴교 조치와 조기 방학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며 시위의 열기를 억누르려 했습니다. 그러자 시위의 주체는 고등학생들에게로까지 번져나갔습니다. 대학에서 휴교와 방학으로 투쟁 동력이 떨어진 자리를 고등학생들이 메우며 반대의 열기를 이어간 것입니다. 야당인 신민당 역시 정치권 내에서 조직적인 대응에 나섰습니다. 호헌 오인위원회와 대통령 삼선개헌 저지투쟁위원회를 잇달아 구성했고 6월에는 재야 인사들과 손잡고 범국민투쟁준비위원회를 결성해 저지 전열을 정비했습니다. 그러나 여당 역시 만만치 않은 대응에 나섰습니다. 대한반공연맹과 대한재향군인회를 비롯한 수십 개의 관변 사회단체를 동원해 개헌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도록 압박했습니다. 심지어 사일구 혁명 관련 단체들의 이름으로 박정희에게 나라를 계속 이끌 기회를 달라는 지지 성명서가 신문에 실리기도 했는데 훗날 이 성명이 관계자들의 부재 중에 임의로 발표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거리의 함성과 관제 여론전이 뒤섞이며 1969년 여름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첨예한 정치적 격동의 시간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국회 제삼별관에서는 그날 새벽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야당인 신민당은 개헌안이 정식 표결에 부쳐지는 것을 막기 위해 국회 본회의장 단상을 점거하고 밤샘 농성을 벌였습니다. 겨우 마흔네 명에 불과한 야당 의원들이 할 수 있는 최후의 저지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이미 국회의원 정수의 삼분의 이를 넘는 의석을 확보하고 있었고 이 저지선을 우회할 방법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1969년 9월 14일 일요일 새벽 두시를 갓 넘긴 시각 국회의사당 인근 호텔에 흩어져 대기하고 있던 여당 의원들에게 은밀한 연락이 전달되었습니다. 잠을 자다 말고 깨어난 의원들은 조용히 골목길을 통해 국회 본관이 아닌 제삼별관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렇게 모인 여당계 의원 백이십이 명은 이효상 국회의장의 사회 아래 기명투표 방식으로 표결을 진행했고 찬성 백이십이 반대 영이라는 결과로 단 몇 분 만에 개헌안과 국민투표법안을 통과시켜 버렸습니다. 야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에서 밤새 농성하는 동안 정작 표결은 전혀 다른 장소에서 순식간에 끝나버린 것입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야당과 국민들은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더욱이 여당이 신민당 소속 의원 세 명을 회유해 찬성 표를 확보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파장은 더욱 커졌습니다. 신민당은 이들의 의원직을 박탈하기 위해 아예 당을 해산한 뒤 신민회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원내 교섭단체를 재구성하는 이례적인 방법까지 동원해야 했습니다. 야당 의원들이 밤새 지켜낸 본회의장은 결국 아무 의미 없는 무대가 되어버렸고 정작 헌법의 운명을 가른 표결은 대다수 국민이 잠들어 있던 새벽 시간 어두운 별관 안에서 조용히 마무리되었습니다. 훗날 이날의 상황을 증언한 여당 의원들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표결에 참여한 의원들조차 자신들이 무슨 역사적 장면의 한복판에 서 있는지 뚜렷하게 실감하지 못한 채 그저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고 전해집니다.

국민투표라는 마지막 관문은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요

국회를 통과한 개헌안은 헌법 절차에 따라 국민투표에 부쳐지게 되었습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9월 18일 헌법개정안을 정식으로 게시했고 여야는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전국을 돌며 치열한 찬반 유세를 벌였습니다. 야당은 삼선개헌이 정권 교체 가능성이라는 민주주의의 최소한의 조건을 파괴하는 반역적인 행위라고 규정하며 국민들의 반대표를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국회 표결이라는 첫 관문을 넘어선 여당의 우위는 쉽게 뒤집히지 않았습니다. 1969년 10월 17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투표율 칠십칠 점 일 퍼센트에 찬성률 육십오 점 일 퍼센트라는 결과로 개헌안은 최종 확정되었습니다. 이로써 박정희는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할 수 있는 법적 자격을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이듬해 치러진 선거에서 당시 신민당 후보였던 김대중을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세 번째 임기를 시작하게 됩니다. 김대중은 선거 유세 과정에서 이번에 정권 교체를 이루지 못하면 박정희의 영구 집권과 총통 시대가 올 것이라는 강한 경고를 던졌는데 이 예언은 안타깝게도 머지않아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이 남긴 질문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줄까요

삼선 개헌은 겉으로는 합법적인 헌법 개정 절차를 밟은 사건처럼 보입니다. 국회의 의결을 거쳤고 국민투표라는 절차도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야당이 점거한 본회의장을 피해 새벽 시간 별도의 장소에서 이루어진 표결 여당 의원 매수 의혹 그리고 관변단체를 동원한 조직적인 여론전까지 절차의 겉모습만 갖췄을 뿐 그 안에는 힘으로 밀어붙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 사건이 갖는 무게는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과 이어서 볼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삼선 개헌으로 확보한 세 번째 임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박정희는 불과 삼 년 뒤인 1972년 아예 대통령 직선제 자체를 폐지하는 유신체제를 선포하게 됩니다. 즉 삼선 개헌은 그 자체로 끝난 사건이 아니라 이후 이어질 장기 독재로 향하는 첫 번째 다리였던 셈입니다. 강력한 리더십이라는 명분이 반복해서 헌법의 틀을 넘어설 때 그 사회가 결국 어떤 길을 걷게 되는지 삼선 개헌의 역사는 오늘날까지도 무거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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