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공화국의 출범과 종말: 독재의 그늘과 민주화의 열망

 

1979년 12월 12일 추운 겨울 밤, 서울 한복판에서 울려 퍼진 총성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박정권의 갑작스러운 종식으로 찾아온 민주화의 봄을 기대했던 국민들의 소박한 꿈은, 밤사이에 전격적으로 권력을 잡은 신군부 세력의 군화 짓밟힘 속에 무참히 깨지고 말았습니다. 12·12 군사 반란으로 군권을 상악한 신군부는 1980년 5월 전국에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던 광주 시민들의 목소리를 유혈 진압했습니다. 이 무력 진압의 아픔 위에 들어선 정권이 바로 제 5공화국입니다. 독재와 언론 통제라는 어두운 그늘 속에서도 경제 성장을 자랑했던 이 시기는, 한편으로는 국민들의 끊임없는 민주화 열망이 용암처럼 분출하던 뜨거운 시대였습니다. 권력의 정점에서 민주주의의 승리로 이어지기까지, 격동의 1980년대를 관통했던 제 5공화국의 출범 배경부터 역사적 종말까지의 파란만장한 과정을 하나씩 들여다보겠습니다.

신군부의 권력 포획과 12·12 군사 반란

1979년 10·26 사태로 유신 체제가 막을 내리자 온 나라에는 민주화에 대한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시기를 서울의 봄이라 부르며 새로운 민주 정부의 출범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군부 내부에서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비밀 사조직인 하나회가 은밀하게 권력을 잡을 계책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 전두광 장군은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로 연행하는 12·12 군사 반란을 감행했습니다. 신군부는 대통령의 승인도 없이 정규 군대를 동원해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했고, 군대의 지휘권을 사실상 무력화시켰습니다. 군권을 완전히 지배하게 된 신군부는 사실상 국정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으며, 민주화를 열망하던 정치인들과 국민들의 기대를 무참히 짓밟고 권력의 중심부로 급속하게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의 비극과 제 5공화국의 출범

12·12 군사 반란 이후 신군부의 권력 독점에 반발하여 1980년 봄, 전국의 대학생들과 시민들은 비상계엄 해제와 신군부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치 활동을 전면 금지시켰습니다. 이에 맞서 광주에서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항쟁인 5·18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신군부는 계엄군을 투입해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고 다치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광주의 피를 뒤로한 채 신군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라는 비헌법적 기구를 설치하여 국정을 실질적으로 통제했습니다. 이후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체육관에서 치러진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를 통해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이어 7년 단임의 대통령 간선제(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지 않고 대표들이 대신 뽑는 제도)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을 확정하고, 1981년 제12대 대통령으로 재선출되면서 제 5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출범했습니다.

언론 통제와 3S 정책이라는 우민화 공작

제 5공화국 정권은 정통성(권력이나 정권이 정당한 자격과 명분을 갖추고 있음)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국민들의 비판적인 눈과 귀를 가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우선 1980년 언론통합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언론사를 강제로 폐간하거나 통합시켰고, 비판적인 언론인들을 대거 해직했습니다. 또한 보도지침을 매일 각 언론사에 내려보내 기사의 크기, 위치, 어조까지 강제로 지시하며 언론을 완벽하게 통제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국민들의 정치적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이른바 3S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 3S란 Screen(영화), Sports(스포츠), Sex(성)를 의미합니다. 프로야구와 프로씨름이 이 시기에 출범했고,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었으며, 칼라 TV 방송이 본격화되었습니다. 국민들은 대중문화와 스포츠에 열광했지만, 그 뒤에는 독재 정권의 비리와 정통성 부재를 덮으려는 정교한 정치적 계산이 숨어 있었습니다.

3저 호황과 경제 성장이라는 제 5공화국의 빛과 그림자

제 5공화국 시기 동안 정권이 가장 강력한 홍보 수단으로 삼았던 것은 바로 경제적 성과였습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대한민국 경제는 이른바 3저 호황이라는 전례 없는 호재를 맞이했습니다. 3저란 저유가(낮은 원유 가격), 저달러(낮은 미국 달러 가치), 저금리(낮은 국제 이자율)를 뜻합니다. 이러한 유리한 국제 경제 여건 덕분에 한국의 수출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매년 10퍼센트가 넘는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습니다. 물가 역시 비교적 안정세를 유지했으며, 자동차와 가전제품이 보급되면서 중산층의 비중이 늘어나고 국민들의 생활 수준도 전반적으로 향상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성장의 그늘에는 여전히 노동자들의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 환경이 존재했고, 정권과 대기업 사이의 정경유착 및 거대한 비자금 조성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제 5공화국은 경제적 성과를 바탕으로 정권의 정당성을 얻으려 했으나,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까지 돈으로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4·13 호헌 조치

1987년에 들어서자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더 이상 누를 수 없을 정도로 거세졌습니다. 국민들은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뽑는 간선제 대신, 국민이 직접 손으로 대통령을 뽑는 직선제 개헌(헌법을 바꾸거나 수정함)을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그러던 중 1987년 1월, 서울대학교 학생이었던 박종철이 경찰의 잔혹한 고문으로 사망하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당초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라는 황당한 거짓말로 사건을 은폐하려 했으나, 진실이 폭로되면서 온 국민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대통령은 1987년 4월 13일, 국민들의 개헌 요구를 전면 거부하고 기존의 헌법대로 차기 대통령을 뽑겠다는 4·13 호헌 조치를 발표했습니다. 이 조치는 기름을 안고 불길 속으로 뛰어든 격이 되었으며, 정권에 대한 국민적 저항 운동에 완연한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6월 민주 항쟁과 6·29 선언으로 무너진 제 5공화국

4·13 호헌 조치 이후 민주화를 향한 대중적인 투쟁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야당과 시민사회단체들은 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을 결성하여 대대적인 항쟁을 준비했습니다. 시위 도중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임사 상태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하자, 국민들의 분노는 폭발했습니다. 마침내 1987년 6월 10일, 전국의 수백만 명의 학생들이라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6월 민주 항쟁을 전개했습니다. 명동성당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며칠 동안 이어진 격렬한 시위 앞에서 신군부 세력은 더 이상 무력으로 국민을 압복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정권의 후계자였던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는 1987년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 수용과 민주화 조치를 약속하는 6·29 선언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로써 국민들의 힘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을 수 있는 제9차 개헌이 이루어졌고, 제 5공화국은 역사 속으로 쓸쓸히 퇴장하게 되었습니다.

제 5공화국이 현대사에 남긴 준엄한 교훈

제 5공화국의 7년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어둡고도 뜨거웠던 교차점이었습니다. 무력으로 집권한 군사 정권이 언론을 탄압하고 국민들의 자유를 빼앗았지만, 역설적으로 그 혹독한 탄압은 우리 국민들의 민주주의 의식을 더욱 견고하게 단련시켜 주었습니다. 광주에서 흘린 피와 6월 거리에서 목이 터져라 외쳤던 민주화의 함성은 마침내 장기 독재의 사슬을 끊어내고 대한민국에 성숙한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제 5공화국의 종말은 정통성이 없는 권력은 아무리 강력한 무력과 경제적 성과를 무기로 삼더라도 결코 국민 위에 영원히 군림할 수 없다는 준엄한 역사적 진리를 증명해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표현의 자유와 투표의 권리가 1980년대 제 5공화국의 어둠에 맞서 싸운 수많은 사람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 위에 세워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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