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20년 만에 다시 불붙은 반일 감정
1964년 봄 서울의 거리는 다시 뜨거워졌습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지 스무 해가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국민들은 정부가 그 일본과 서둘러 국교를 정상화하려 한다는 소식에 분노했습니다. 식민 지배의 상처가 여전히 생생했던 그 시절 많은 이들에게 이 소식은 받아들이기 힘든 충격이었습니다.
저는 6.3 항쟁을 들여다볼 때마다 그 시대 청년들의 절박함을 생각하게 됩니다. 나라의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본의 자본이 절실했던 현실과 식민 지배의 아픔을 잊을 수 없었던 국민 감정이 정면으로 충돌했던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대학 캠퍼스를 가득 채웠던 청년들의 함성 속에는 단순한 반일 감정을 넘어 정부가 국민 몰래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한다는 데 대한 근본적인 불신이 깔려 있었습니다. 오늘은 6.3 항쟁이 어떻게 시작되고 확산되었는지 그리고 그 결과로 맺어진 청구권 협정이 실제로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함께 짚어보려 합니다.
밀실에서 진행된 협상이 불러온 분노
한일 국교 정상화 움직임은 1962년부터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종필은 여러 차례 일본을 오가며 협상을 이어갔고 1964년 3월에는 일본 외무장관과 조약 초안을 마련해 협정에 조인하기로 일정까지 합의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그동안 쌓여 있던 국민의 불만이 한꺼번에 폭발했습니다.
당시 야당과 재야 인사들은 이미 대일 굴욕외교 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를 결성해 전국을 돌며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습니다. 윤보선과 장택상 유진오 장준하 같은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이 투쟁을 이끌었습니다. 이들은 일본의 진심 어린 사죄와 반성 없이 국교를 정상화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특히 정부와 여당이 협상 내용을 국민에게 제대로 공개하지 않은 채 밀실에서 일을 진행했다는 사실이 분노를 더욱 키웠습니다. 국민들 사이에서는 해방된 지 스무 해 만에 다시 왜놈들과 얽혀야 하느냐는 격한 표현까지 등장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를 이해하려면 그 세대가 겪은 역사를 함께 봐야 합니다. 일제강점기를 직접 몸으로 겪은 이들이 아직 사회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해방 이후 태어난 젊은 세대 역시 부모로부터 전해 들은 식민지 시절의 기억으로 반일 정서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과거사에 대한 명확한 사과와 반성의 뜻을 밝히지 않은 채 협상 테이블에 앉으려 한다는 소식은 국민 정서를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대학생들의 거리 투쟁과 계엄령 선포
1964년 3월 24일 마침내 대학생들이 거리로 나섰습니다.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반대한다는 구호를 앞세운 시위가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으로 번져나갔습니다. 3월 9일에는 서울 종로예식장에서 정치인과 재야 인사들이 모여 구국선언을 채택했고 투쟁위원회 의장을 맡은 윤보선이 직접 이를 낭독하며 저항의 의지를 다졌습니다.
시위는 시간이 지날수록 규모가 커졌습니다. 처음에는 서울 시내 대학가에 국한되었던 움직임이 점차 전국 각지의 대학과 일반 시민 사회로 확산되었습니다. 같은 해 6월 3일에는 서울에서만 대학생 오천여 명이 시위에 나섰고 전국 주요 도시에서 팔만 명이 넘는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박정희 정부는 그날 밤 열 시에 서울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해 시위를 강제로 진압했습니다. 이 계엄은 이후 7월 말까지 두 달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당시 미국 정부가 한일 관계 개선을 전략적으로 지지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시위에 오히려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냉전이라는 국제 정세 속에서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 손을 잡아야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 확산을 함께 막아낼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한일 관계 정상화를 가로막는 국내 시위는 달갑지 않은 걸림돌이었습니다. 결국 미국은 계엄령 선포라는 강경 조치를 사실상 묵인하는 태도를 보였고 이는 한국 내에서 벌어지는 민주적 요구보다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우선시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타결된 협정과 청구권 자금 3억 달러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협상은 결국 진행되었습니다. 1965년 6월 22일 한국과 일본은 한일기본조약을 정식으로 체결하며 국교를 수립했습니다. 조약 2조에서는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체결된 모든 조약과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명시했습니다. 이는 을사조약을 비롯한 과거의 불평등 조약들이 원천적으로 효력이 없었다는 점을 조약문 자체에 담았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를 지닌 조항이었습니다. 이 조약의 부속 협정으로 맺어진 청구권 협정에서 일본은 조선에 투자했던 자본과 일본인의 개별 재산에 대한 권리를 모두 포기하는 대신 한국에 무상 3억 달러와 유상 차관 2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 대가로 한국은 일본에 대한 모든 청구권을 포기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이 3억 달러라는 금액은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한국 정부의 한 해 예산이 팔백억원 남짓이었는데 무상으로 지원받은 자금이 그 예산의 상당 부분에 맞먹을 정도였습니다. 외자를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 이 자금은 이후 경제 개발 계획을 추진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정부는 이 자금을 산업 시설과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투입했고 이는 훗날 한국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는 데 적잖은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당시 정부는 이 자금이 어떻게 쓰였는지 국민에게 소상히 밝히기 위해 훗날 청구권자금 백서까지 발간했습니다. 자금은 종합제철소 건설을 비롯해 고속도로와 항만 같은 대형 사회간접자본 사업에 두루 투입되었습니다. 척박한 자본 환경 속에서 이만한 규모의 자금이 한꺼번에 들어온 것은 분명 이례적인 기회였고 이후 한국 경제가 도약하는 데 실질적인 발판이 되었다는 점은 여러 경제사 연구에서도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절반만 채워진 정의
그러나 이 청구권 자금이 진정한 사죄와 배상의 의미를 담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당시 식민 지배로 인한 피해 규모를 추산한 금액과 비교하면 실제로 지급된 3억 달러는 그 십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게다가 강제 징용 피해자나 일본군에 의한 인명 피해 문제는 협정에서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 자금이 국가 대 국가의 경제협력 명목으로 지급되었다는 점입니다. 정부는 이 자금이 식민 지배 피해자 개개인을 위한 보상이라고 선전했지만 실제 협상 과정과 세부 내용은 오랫동안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습니다. 협정 문서가 공개된 것은 그로부터 무려 반세기 가까이 지난 뒤였습니다. 이후 정부가 정한 보상 절차에 따라 실제로 개인에게 지급된 금액은 무상 지원금 전체의 십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국가가 국민 개개인의 청구권을 일괄적으로 대신 처리했다는 방식 자체가 훗날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소송으로 이어지며 두고두고 갈등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부속 협정으로 함께 체결된 어업협정 역시 두고두고 논란거리가 되었습니다. 독도 인근 수역을 공동어로구역으로 설정한 조항은 이후 독도를 둘러싼 갈등의 새로운 불씨로 작용했습니다. 협상 당시 정부가 여러 사안에서 충분한 대비 없이 서둘러 합의를 이끌어냈다는 비판이 지금까지도 꾸준히 제기되는 이유입니다.
협상이 남긴 빛과 오래된 그늘
6.3 항쟁과 한일 국교 정상화를 돌아보면 이를 단순한 성공이나 실패로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청구권 자금이 가난했던 한국 경제에 실질적인 도움을 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외자 도입의 물꼬를 트고 이후 경제 개발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분명한 성과였습니다. 만약 그때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이후 한국 경제가 걸어온 성장의 속도는 지금과 사뭇 달랐을 것이라는 분석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국민적 합의와 충분한 사죄 없이 정부 주도로 서둘러 진행되었다는 점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밀실에서 이루어진 협상은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했고 이는 결국 계엄령이라는 무력 진압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무엇보다 개인의 피해가 국가 간 경제협력이라는 이름 아래 뭉뚱그려지면서 정작 고통을 겪었던 이들의 목소리는 제대로 반영되지 못했습니다.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강제징용 배상 문제가 한일 관계의 뜨거운 쟁점으로 남아 있는 것은 그날의 협상이 완전히 매듭짓지 못한 숙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결국 6.3 항쟁과 그 뒤를 이은 한일 국교 정상화는 경제적 실리와 역사적 정의라는 두 가치가 정면으로 맞부딪힌 사건이었습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실리를 택한 정부의 선택과 과거사에 대한 온전한 청산을 요구했던 국민의 열망 사이에서 우리는 지금도 완전한 답을 찾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날 거리로 나섰던 청년들의 외침이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질문으로 남아 있는 이유입니다. 경제 성장이라는 눈앞의 성과와 온전한 역사적 매듭짓기 중 무엇이 더 우선되어야 했는지에 대한 논쟁은 앞으로도 쉽게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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