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남북 공동 성명 분단 이후 최초의 대화 그 성과와 한계

 


1972년 7월 4일 오전 열 시 대한민국 국민들은 텔레비전 앞에서 낯선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평소 음지에서 일하며 좀처럼 얼굴을 드러내지 않던 중앙정보부장이 몹시 상기된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서서 성명서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같은 시각 북쪽의 평양에서도 똑같은 내용의 성명이 발표되고 있었습니다. 북측에서는 주석의 동생이자 핵심 실세인 인물이 대신 마이크를 잡고 같은 문서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과 북의 정부가 같은 시간 같은 내용의 문서를 함께 세상에 내놓은 순간이었습니다.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채 이십 년 가까이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던 두 정부가 어떻게 하루아침에 손을 맞잡을 수 있었을까요 그 배경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물밑의 비밀 접촉과 국경을 넘나든 특사들의 발걸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대화는 왜 오래 이어지지 못했을까요

냉전의 얼음이 녹기 시작한 국제정세는 무엇이었을까요

1948년 남과 북에 각각 정부가 들어선 이후 두 나라는 공식적인 대화 한번 없이 대결과 무력 충돌을 반복해왔습니다. 그런 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뜻밖에도 한반도 바깥의 국제정세 변화 때문이었습니다. 베트남전에서 막대한 인명과 비용을 쏟아붓고도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미국은 1969년 닉슨 독트린을 선언하며 동맹국이 스스로의 힘으로 방위해야 한다는 새로운 노선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곧 미국이 아시아에서의 개입을 줄이겠다는 신호였습니다. 여기에 1971년 국제연합에서 중화민국이 축출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상징적인 사건이 벌어졌고 이듬해에는 미국 대통령 닉슨과 중국 수상 저우언라이가 상하이에서 공동성명을 발표하며 양국의 화해 무드가 본격화되었습니다. 냉전의 최전선이었던 동아시아에서마저 얼어붙었던 관계가 풀리기 시작한 이른바 데탕트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이러한 국제적 흐름은 자연스럽게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강대국들이 서로 손을 잡는 시대에 남과 북만 예전처럼 대결 구도를 고집할 명분이 옅어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상하이 공동성명에는 미국이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교류 증진을 지지한다는 내용과 함께 중국이 북한의 평화통일 방안을 지지한다는 내용이 함께 담겼는데 이는 두 강대국이 한반도 문제에서도 발을 맞추려 하고 있다는 신호로 읽히기에 충분했습니다. 남과 북 모두 이러한 국제 흐름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스스로 먼저 변화의 몸짓을 보여야 할 필요를 느꼈을 것입니다.

국내의 정치적 위기는 대화의 문을 여는 데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국제정세의 변화만으로 이 극적인 대화가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남과 북 모두 각자의 국내 사정에서도 대화가 필요한 이유를 안고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경우 박정희 정부는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을 비롯한 여러 사회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고 정치적 정당성을 보강할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시 국제 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우방국인 미국 중국의 화해 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유연한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북한은 남한의 여당인 민주공화당을 포함해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 개별 인사들과도 아무 때나 접촉할 용의가 있다는 전향적인 태도를 공개적으로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남과 북 모두에게 대화는 순수한 통일 열망의 산물이라기보다 각자의 정치적 필요와 맞물려 시작된 측면이 있었습니다. 이 점은 훗날 공동성명이 왜 그토록 허무하게 동력을 잃었는지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되기도 합니다.

이후락과 김일성은 평양에서 무엇을 이야기했을까요

물밑에서의 접촉은 판문점에서 실무자들이 은밀하게 만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논의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간 것은 훨씬 높은 급의 인사들이었습니다. 1972년 5월 2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비밀리에 평양으로 향해 김일성의 동생이자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인 김영주와 마주 앉았습니다. 분단 이후 남북 고위급 인사가 처음으로 얼굴을 맞댄 순간이었습니다. 이후락은 그 자리에서 남측의 극우 세력으로부터 테러를 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이념을 제쳐둔 채 통일 문제를 논의하러 왔다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다음 날에는 김일성 주석과 직접 면담이 이루어졌습니다. 김일성은 이 자리에서 1968년 청와대 인근까지 무장 공작원을 침투시켰던 사건에 대해 사과의 뜻을 표하며 다시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없을 것이라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락이 상호 비방과 무력 도발의 중지를 주로 제기한 반면 김일성은 외세 의존 반대와 평화적 해결 민족 대단결이라는 세 가지 원칙과 함께 남북조절위원회 구성을 제안했습니다. 이어 같은 달 29일부터 이틀간은 북한의 박성철 제2부수상이 이번에는 반대로 서울을 방문해 이후락과 회담하고 청와대에서 박정희를 직접 만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양측 최고위급 사이에서 은밀하게 오간 대화의 결과물이 바로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 삼대 원칙이었습니다. 훗날 공개된 회담 기록을 보면 양측은 첫 만남에서부터 서로의 진심을 조심스럽게 탐색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김영주가 이제부터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많이 나누어야 한다고 말하자 이후락은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 자체가 대단히 역사적인 일이라고 화답했다고 전해집니다. 오랜 세월 서로를 향한 적대감으로 굳어 있던 두 진영의 최고위급 인사들이 처음으로 인간적인 언어를 주고받은 장면이었던 셈입니다.

공동성명이 발표되던 그 순간 국민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1972년 7월 4일 오전 열 시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된 공동성명에는 세 가지 통일 원칙 외에도 여러 구체적인 합의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남북 사이의 긴장을 완화하고 신뢰를 쌓기 위해 서로에 대한 중상과 비방 무장 도발을 자제하기로 했으며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를 확대하기로 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합의를 실제로 이행하기 위한 기구로 남북조절위원회를 설치하고 서울과 평양 사이에 상설 직통전화를 놓기로 했습니다. 이십사 년 동안 서로를 적으로만 규정해온 두 정부가 이런 내용을 함께 발표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사회에는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오랜 세월 전쟁의 공포와 반공 교육 속에서 살아온 국민들에게 어쩌면 통일이 머지않았다는 기대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한 소식이었습니다. 언론은 이 소식을 대서특필했고 거리에서는 시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라디오와 텔레비전 뉴스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분단이라는 현실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세대에게 적국이라 배워온 상대와 손을 맞잡는 장면은 그 자체로 낯설고도 벅찬 경험이었습니다.

화해의 약속은 왜 일 년을 채 넘기지 못했을까요

그러나 이 극적인 합의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해 십월 남북조절위원회 회의가 시작되었지만 회담이 거듭될수록 양측의 근본적인 입장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났습니다. 북한은 회담에서 무력 증강과 군비 경쟁의 중단 남북 군대의 대폭 감축 그리고 무엇보다 주한미군을 포함한 외국 군대의 철수를 핵심 의제로 거듭 요구했습니다. 반면 남한 정부의 입장에서 주한미군 철수는 결코 수용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결국 통일을 향한 방법론에서부터 남과 북은 처음부터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셈입니다. 여기에 더해 공개되지 않았던 미국 정보기관의 문건에 따르면 애초에 박정희 정부가 남북 대화에 쏟은 진정성 자체가 그리 높지 않았다는 정황도 드러납니다. 남북조절위원회를 애초부터 실질적인 결정권이 없는 실무진 위주로 구성하고 그 기능도 적십자회담을 지원하거나 비무장지대에서의 우발적 충돌을 방지하는 수준에 그치게 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회담은 해를 넘기지 못하고 급속히 동력을 잃었고 1973년 팔월 북한이 남북조절위원회 회의 참석 자체를 거부하면서 대화는 완전히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공동성명 발표 일 주년이 되던 그해 여름 북한은 오히려 유엔 동시 가입을 추진하던 남한을 향해 한반도 분단을 고착시키려 한다는 격한 비난을 쏟아내기까지 했습니다. 불과 일 년 전 같은 시각 같은 문서를 함께 읽어 내려가던 두 정부가 다시 서로를 향해 날선 언사를 주고받는 사이로 되돌아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 짧았던 대화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을까요

칠사 남북공동성명이 남긴 역사적 의미는 분명합니다.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과 북의 정부가 대결이 아닌 평화적 통일이라는 원칙에 공식적으로 합의한 문서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사건은 이후 모든 남북 대화의 출발점으로 평가받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이라는 세 가지 원칙은 이때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명이 남긴 그림자 역시 가볍지 않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공동성명이 발표된 직후 남과 북은 각각 오히려 권력을 더욱 집중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남한에서는 그해 십월 유신체제가 선포되며 대통령의 권한이 극단적으로 강화되었고 북한에서도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유일체제가 한층 공고해졌습니다. 대화와 화해라는 명분이 오히려 양측 모두에게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었다는 비판이 지금까지도 제기되는 이유입니다. 통일을 향한 순수한 열망과 각자의 정치적 계산이 뒤섞인 채 시작된 이 짧은 대화는 결국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이용이라는 복잡한 유산을 후대에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이어진 모든 남북 대화와 합의는 결국 이 성명이 세운 세 가지 원칙의 틀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오십 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이라는 표현이 여전히 통일 논의의 출발점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칠사 남북공동성명은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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