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을 가로지르던 다리가 아침 출근길에 두 동강 났습니다. 그리고 8개월 뒤 서울 한복판의 백화점이 순식간에 주저앉았습니다. 성수대교 붕괴와 삼풍백화점 붕괴는 각각 서른두 명과 오백두 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사였습니다. 두 사고는 우연히 겹친 불운이 아니었습니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것을 이루려 했던 한국 사회가 안전이라는 기본을 얼마나 소홀히 다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등굣길 학생들과 퇴근을 앞둔 직장인들이 평범한 하루를 보내다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은 지금 돌이켜봐도 마음을 무겁게 만듭니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를 다시 들여다보는 일은 단순히 지나간 사고를 복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딛고 선 사회 기반이 어떤 대가 위에 세워졌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두 사고는 각각 다리와 건물이라는 전혀 다른 시설물에서 일어났지만 원인을 파고들수록 같은 뿌리에서 자란 두 개의 열매처럼 닮아 있었습니다. 그 뿌리가 무엇이었는지 지금부터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출근길 다리가 무너지던 순간 무슨 일이 있었나
1994년 10월 21일 금요일 아침 일곱 시 사십 분경 성수대교의 중간 부분이 갑자기 붕괴했습니다. 등굣길과 출근길 차량이 지나던 상판 약 사십팔 미터가 그대로 한강으로 떨어졌습니다. 무너진 상판 위에는 시내버스를 포함한 여러 대의 차량이 타고 있었고 그 대부분이 함께 추락했습니다. 이 사고로 서른두 명이 목숨을 잃었고 열일곱 명이 다쳤습니다. 사망자 중에는 등교하던 무학여자고등학교 학생 여덟 명과 무학여자중학교 학생 한 명이 포함되어 있어 사회적 충격이 더욱 컸습니다. 성수대교는 1977년 착공해 1979년에 준공된 한강의 열한 번째 다리였습니다. 시공은 동아건설이 맡았고 관리 책임은 서울시에 있었습니다. 준공 당시 설계는 하루 평균 이용 차량 육만 대와 최대 통과 하중 삼십이 톤을 기준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십오 년이 지난 사고 시점에는 하루 이용 차량이 십만 대를 넘었고 통과 하중도 사십삼 톤을 웃돌 만큼 통행량이 폭증했습니다. 특히 사고 전해인 1993년 동부간선도로가 개통되면서 다리를 지나는 차량은 더욱 늘어났지만 이에 걸맞은 안전 대책은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사고 당일 오전 무너진 상판 위에 있던 한성운수 소속 시내버스와 승용차 여러 대가 한강으로 그대로 떨어졌습니다. 다리 밑을 지나던 배들과 인근 주민들이 급히 구조에 나섰고 경찰과 소방 인력도 총동원되었지만 갑작스레 물속으로 떨어진 상판 위 차량 안에서 많은 이들이 미처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사고 소식은 국내뿐 아니라 미국과 일본 등 해외 언론에도 크게 보도되면서 한국의 국가 이미지와 건설업계 신뢰도에 상당한 타격을 남겼습니다.
설계와 시공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
성수대교는 트러스 구조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여러 개의 삼각형 철골 부재가 서로 힘을 나눠 받도록 짜인 구조입니다. 문제는 이 구조에서 수직재가 끊어질 경우를 대비한 여유 응력이 설계 단계에서 충분히 확보되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즉 부재 하나가 손상되면 그 하중을 다른 부재가 감당하지 못하고 연쇄적으로 무너질 위험을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공 과정의 결함은 더 치명적이었습니다. 핀 플레이트와 수직재 사이를 잇는 용접은 원래 단면 전체가 완전히 붙도록 시공되어야 했지만 실제로는 용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로 마감되었습니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내부는 온전히 붙지 않은 절반짜리 용접이었던 셈입니다. 이런 상태로 십오 년간 통행량이 늘면서 미세한 균열이 서서히 커졌고 결국 피로 파괴로 이어졌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사고 전 몇몇 시민들이 다리를 지나며 이상한 진동이나 소음을 느끼고 신고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정밀 안전 진단은 준공 후 이십 년이 지난 교량에만 실시한다는 규정에 묶여 성수대교는 단 한 차례도 정밀 진단을 받지 못했습니다. 일 년에 네 차례 이루어진 점검도 육안으로 훑어보는 형식적인 수준에 그쳤습니다. 시민의 경고와 제도의 허점이 겹치면서 예견된 위험은 방치되었고 결국 참사로 이어졌습니다. 사고 이후 조사 과정에서는 설계사인 대한컨설턴트와 시공사인 동아건설 양쪽 모두에 책임이 있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설계 단계에서 구조적 여유를 확보하지 못한 잘못과 시공 단계에서 용접을 부실하게 처리한 잘못이 겹치면서 하나의 부재가 손상되자 곧바로 전체 구조가 무너지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진 것입니다. 결국 성수대교 붕괴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설계와 시공과 관리라는 세 단계 모두에서 기본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준 사례로 남았습니다.
백화점 회장은 붕괴를 알고도 무엇을 대피시켰나
성수대교 붕괴가 있은 지 팔 개월 만인 1995년 6월 29일 오후 다섯 시 오십칠 분경 서울 서초동의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습니다. 이 건물은 원래 종합 상가로 설계되었으나 공사가 상당히 진행된 뒤 삼풍그룹 회장 이준의 지시로 백화점 용도에 맞게 무리하게 구조가 변경되었습니다. 매장 면적을 넓히기 위해 기둥의 굵기를 줄이고 일부 기둥은 아예 제거하는 방식으로 설계가 바뀌었습니다. 옥상에는 원래 계획에 없던 냉각탑까지 설치되면서 건물이 감당해야 할 하중은 더욱 늘어났습니다. 붕괴 하루 전날 밤 옥상과 오층 식당가에서 심상치 않은 균열과 소리가 감지되었습니다. 사고 당일에도 여러 차례 대책 회의가 열렸지만 백화점 측은 영업을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일부 증언에 따르면 위험 신호가 감지된 뒤 경영진이 먼저 챙긴 것은 손님의 안전이 아니라 값비싼 물건과 서류였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결국 오후 다섯 시 오십칠 분 건물은 단 십여 초 만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 사고로 오백두 명이 사망했고 구백삼십칠 명이 다쳤으며 실종자도 서른한 명에 달했습니다. 사망자 가운데 여성이 절대다수를 차지했는데 이는 당시 백화점 이용객과 여성 직원 비중이 높았던 사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붕괴 전 이 건물은 1994년과 1995년 세 차례에 걸쳐 안전 점검을 받았지만 매번 이상 없다는 판정이 내려졌습니다. 형식적인 점검이 실제 위험을 걸러내지 못한 것입니다. 조사 결과 슬래브 상하부 철근의 배근 간격이 기준에 맞지 않았고 기둥과 슬래브가 만나는 부분의 시공도 부실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여기에 옥상과 오층 식당가에 몰린 과도한 하중이 더해지면서 건물은 이미 붕괴를 향해 서서히 나아가고 있었던 셈입니다. 설계와 감리를 맡았던 이들이 현장 조사서를 사실과 다르게 작성해 관할 구청에 제출했다는 사실도 뒤늦게 밝혀지면서 부실 시공을 감추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압축 성장의 그늘은 왜 반복되었나
두 참사는 시기와 장소만 다를 뿐 원인의 뿌리는 놀랍도록 닮아 있었습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은 짧은 기간에 도로와 교량과 건물을 대량으로 지어야 했던 고도 압축 성장기를 지나왔습니다. 이 시기 다리만 해도 1970년대 한 해 걸러 여러 개씩 새로 놓일 정도로 건설 속도가 빨랐습니다. 빠른 속도를 우선하다 보니 설계 기준은 당장의 필요에 맞춰졌을 뿐 미래의 하중 증가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습니다. 시공 현장에서는 공사 기간과 비용을 줄이기 위해 용접이나 철근 배근 같은 기초 공정이 소홀히 다뤄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준공 이후의 유지 관리 체계도 부실했습니다. 정밀 진단 기준이 지나치게 느슨하거나 점검이 형식에 그치면서 시설물이 노후화되는 과정을 제대로 감시하지 못했습니다. 관리 책임을 맡은 행정 기관과 시공을 맡은 건설사 모두 문제의 조짐을 알고서도 후속 조치를 미루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성수대교의 경우 시민의 신고에도 정밀 점검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삼풍백화점의 경우 경영진이 붕괴 조짐을 인지하고도 영업을 강행했습니다. 두 사고 모두 결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던 인재였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입니다. 당시는 전국 곳곳에서 도시가스 폭발 사고와 지하철 공사장 가스 폭발 사고가 잇따르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성수대교 붕괴 이후 채 일 년이 지나지 않아 대형 참사가 연달아 일어나면서 국민들 사이에서는 언제 어디서 비슷한 사고가 또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커졌습니다. 성장의 속도만을 자랑하던 사회가 그 이면에 쌓아둔 위험을 한꺼번에 드러내 보인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참사는 이후 사회를 어떻게 바꾸었나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는 한국 사회에 안전 불감증이라는 표현을 각인시킨 사건이었습니다. 두 사고를 계기로 정부는 전국의 교량과 건축물에 대한 전수 안전 점검을 실시했고 이후 시설물의 안전 및 유지관리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는 등 제도적 정비가 이어졌습니다. 건설 현장의 감리 제도도 강화되어 설계와 시공 과정을 이전보다 엄격하게 감독하도록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제도가 정비되었다고 해서 문제가 완전히 해소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시설물 사고가 반복되면서 안전 관리가 여전히 형식에 머무르고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습니다. 삼풍백화점 회장 이준은 업무상 과실치사 등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고 칠 년 육 개월간 복역한 뒤 출소했으며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성수대교는 붕괴 이후 재시공을 거쳐 1997년 다시 개통되어 지금도 한강을 오가는 시민들이 이용하고 있습니다. 삼풍백화점이 있던 자리에는 이후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섰지만 사고 현장 인근에는 지금도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탑이 세워져 그날의 기억을 전하고 있습니다. 두 참사에서 얻은 교훈은 결국 화려한 결과물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초 공정과 꾸준한 유지 관리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가 남긴 서른두 명과 오백두 명의 희생은 지금 우리가 이용하는 다리와 건물 하나하나가 결코 당연하게 안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되새기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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