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돌아오면 다행이라는 항해
견당사는 630년부터 894년까지 약 260년에 걸쳐 일본이 중국 당나라에 보낸 공식 사절단을 가리킵니다. 이 기간 동안 총 열아홉 차례 파견이 이루어졌는데 그 가운데 두 차례는 아예 항해 자체가 실패로 끝났고 나머지 중에서도 실질적으로 당나라를 향해 정식으로 떠난 경우는 열세 차례 정도로 추려집니다. 견당사선은 지금의 정크선과 비슷한 구조를 갖추고 있어 파도를 견디는 데는 어느 정도 강했지만 갑작스러운 기상 변화에는 매우 취약했습니다. 배 한 척당 약 백 명이 탑승했고 보통 네 척이 하나의 선단을 이루어 항해했는데 후기로 갈수록 선단 전체가 풍랑에 휩쓸려 조난당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초기에는 한반도 해안을 따라가는 북쪽 경로를 주로 이용했지만 백강 전투 이후 신라와의 관계가 단절되면서 어쩔 수 없이 동중국해를 곧바로 가로지르는 남쪽 경로를 개척해야 했습니다. 이 남쪽 항로는 거리가 짧아지는 대신 육지를 거의 볼 수 없는 원양 항해가 되면서 위험성이 오히려 크게 높아졌고 실제로 매번 조난자가 나올 정도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목숨을 건 항해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견당사는 주로 중국의 새해 행사에 맞춰 도착하기 위해 여름에서 가을 사이에 일본을 출발했는데 이 시기는 태풍이 자주 발생하는 계절과 겹쳐 있어 애초부터 위험 부담을 안고 시작하는 여정이었습니다. 항해 도중 방향을 잃거나 예정된 항구를 놓쳐 전혀 엉뚱한 해안에 표착하는 일도 흔했고 이런 이유로 같은 선단에 속한 배들조차 서로 다른 시점에 서로 다른 곳에 도착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네 척의 배가 함께 출항했다가 항해 도중 뿔뿔이 흩어져 각자 다른 운명을 맞이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는데 어떤 배는 무사히 목적지에 닿았지만 다른 배는 소식이 끊긴 채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바다보다 무서웠던 것은 정치였다
견당사 항로가 이렇게 위험해진 데는 단순한 자연조건 탓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7세기 전반까지 일본은 백제를 거치는 경로와 신라를 거치는 경로를 상황에 따라 나누어 사용하며 비교적 안전하게 한반도 연안을 따라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663년 백강 전투에서 왜국과 백제 연합군이 나당 연합군에 패배하고 이후 신라가 한반도 남부를 통일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당과 신라의 관계가 단절되자 일본 역시 더 이상 한반도를 경유하는 안전한 북쪽 경로를 이용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위험을 감수하고 동중국해를 직접 건너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에도 일본과 당나라를 오가는 뱃길 중간에 위치한 탐라국 세력에게 견당사 일행이 약탈을 당하는 일까지 벌어졌고 헤이안 시대에 접어들어 신라와의 관계가 다시 악화되자 신라 해군에게 습격당할 위험까지 거론되었습니다. 결국 국제 정세의 변화 하나하나가 곧바로 항로의 안전 문제로 이어졌고 사신들은 외교 임무 자체보다 먼저 바다를 무사히 건너는 일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665년에는 백강 전투의 뒤처리를 위해 당나라 쪽에서 먼저 왜국으로 사신을 보내오기도 했는데 이 사신이 귀국할 때는 반대로 일본 측이 이들을 호송하는 역할을 맡는 등 두 나라 사이의 외교는 전쟁의 여파 속에서도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고 복잡하게 얽힌 채로 이어졌습니다.
돌아오지 못한 유학생 아베노 나카마로
이 위험한 항해가 남긴 가장 유명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유학생 아베노 나카마로입니다. 그는 717년 제9차 견당사를 따라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워낙 학문에 뛰어났던 그는 당나라 현종을 가까이서 모실 정도로 높은 관직에까지 올랐고 이백이나 왕유 같은 당대 최고의 시인들과도 깊이 교유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장년이 된 나카마로는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마침 당에 왔던 일본 견당사의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러나 귀국길에 오른 배는 풍랑을 만나 난파되었고 그는 지금의 베트남 지역까지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한때 장안에는 그가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소문까지 퍼졌을 정도로 상황이 절망적이었습니다. 다행히 그는 살아남아 견당사 정사와 함께 천신만고 끝에 다시 장안으로 돌아갔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결국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완전히 단념하게 됩니다. 이후 그는 당나라 조정에 요청해 베트남 지역을 관할하는 관직을 맡았고 끝내 고향 땅을 다시 밟지 못한 채 당나라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학문을 위해 바다를 건넜던 청년이 평생 타국에서 살다 눈을 감아야 했던 이 사연은 견당사의 항해가 얼마나 큰 대가를 요구했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가 고향을 그리워하며 지었다고 전해지는 시 한 편은 훗날 일본에서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넓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떠오른 달이 고향에서 보던 달과 같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이역만리에서 평생을 보내야 했던 그의 심정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배에 오른 이유
이렇게 위험한 뱃길이었음에도 견당사에는 관리뿐 아니라 학문을 익히려는 유학생과 불법을 구하려는 승려들이 끊임없이 지원했습니다. 이들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당나라로 향한 이유는 명확합니다. 당시 당나라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발달한 문물과 제도를 갖춘 나라였고 이를 직접 배우고 가져오는 것이 일본의 국가 체제 정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견당사를 통해 들여온 지식은 일본의 율령 제도 정비와 수도 건설에 그대로 반영되었는데 대표적으로 겐메이 천황이 헤이조쿄로 수도를 옮기면서 당나라 장안성의 구조를 그대로 본떠 도시를 설계한 것이 이러한 영향을 잘 보여줍니다. 견당사 일행에는 훗날 천태종을 연 사이초와 진언종을 연 구카이 같은 승려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당나라에서 배운 불교 교리를 가지고 돌아와 일본 불교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습니다. 중국 측 기록에 따르면 일본 사신들은 황제로부터 받은 값비싼 하사품을 시장에 내다 팔아 그 돈으로 대신 서적을 사 모아 귀국했다는 일화도 전해지는데 이는 이들이 무엇을 가장 소중히 여겼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항해였지만 그 위험을 감수할 만큼 당나라의 선진 문물이 지니는 가치가 컸던 셈입니다. 견당사를 통해 오간 것은 서적과 불교 경전만이 아니었습니다. 일본 쪽에서는 비단 제품과 삼베 은과 각종 광물 제품 그리고 향료와 식물성 감미료 등을 가져갔고 반대로 당나라에서는 사상과 제도 역사와 문학을 아우르는 한문 서적과 불상 등 다양한 문물이 함께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오간 물품 하나하나가 이후 일본의 학문과 생활 문화 전반에 스며들었다는 점에서 견당사는 단순한 사신 왕래를 넘어 문명 전체를 통째로 실어 나르는 통로와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당나라의 몰락과 함께 저문 260년
이렇게 오랫동안 이어지던 견당사 파견은 9세기 중엽 들어 서서히 동력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당나라 자체가 정치적으로 쇠퇴하면서 예전만큼 배울 것이 많지 않다는 인식이 퍼졌고 동시에 일본 내에서도 선박 건조와 항해 기술이 오히려 예전보다 뒤떨어지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결정적인 계기는 894년 학자이자 관료였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만들었습니다. 그는 견당대사로 임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나라가 이미 쇠락의 길에 접어들어 더 이상 위험을 무릅쓰고 사신을 보낼 실익이 없다는 취지의 건의를 올렸고 조정은 이를 받아들여 견당사 파견을 사실상 중단했습니다. 이후 몇 년 뒤 당나라가 실제로 멸망하면서 견당사는 자연스럽게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결정을 내린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본인이 훗날 정쟁에 휘말려 억울하게 규슈로 좌천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입니다. 견당사를 끝맺은 인물조차 자신의 정치적 여정에서는 비극을 피하지 못했던 셈입니다. 일각에서는 귀족 사회가 이미 충분한 문화적 자신감을 갖추게 되면서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외부로 나갈 동기 자체가 옅어졌다는 해석도 나옵니다. 견당사가 끊긴 이후 일본은 오히려 대륙 문화를 소화하고 재해석하는 데 집중하며 가나 문자와 함께 고유한 국풍 문화를 꽃피우게 되는데 이는 오랜 세월 위험을 무릅쓰고 흡수해온 대륙 문물이 마침내 일본 안에서 독자적인 형태로 발효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흐름이기도 합니다.
위험을 감수한 항해가 남긴 것
견당사의 260년 역사를 돌아보면 이는 단순한 외교 사절단의 기록이 아니라 한 나라가 스스로를 성장시키기 위해 얼마나 큰 위험을 기꺼이 감수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조난과 표류 그리고 아베노 나카마로처럼 끝내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이들의 희생이 쌓인 끝에 일본은 율령 제도와 불교 문화 도시 설계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들을 흡수할 수 있었습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배워야 할 것이 있다는 절박함이 이 무모해 보이는 항해를 260년이나 지속시킨 원동력이었던 셈입니다. 결국 견당사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거창한 외교 성과의 목록이 아니라 지식과 문물을 향한 갈망이 얼마나 큰 위험까지 감수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인간적인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 비행기로 몇 시간이면 오갈 수 있는 거리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바다 하나를 건너는 일이 곧 삶과 죽음을 가르는 도박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 시기 유학생과 승려들이 품었던 배움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절실했는지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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