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라는 이름이 남긴 흔적
한동안 이 사건은 광주사태라고 불렸습니다. 사태라는 말에는 원인 모를 소란이 일어났다는 뉘앙스가 들어 있습니다. 실제로 1980년 당시 신군부와 언론은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불순분자와 폭도가 일으킨 소요로 규정했습니다. 광주 바깥의 국민 대다수는 오랫동안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사건의 공식 명칭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입니다. 1988년 국회 청문회를 거치고 1995년 관련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국가가 성격을 다시 규정했고 1997년에는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름이 바뀌는 데 십칠 년이 걸린 셈입니다. 그래서 광주사태라는 표현을 볼 때는 그 말이 만들어진 시점과 목적까지 함께 봐야 합니다.
1979년 겨울부터 시작된 배경
이야기의 출발점은 1979년 10월 26일입니다. 십팔 년간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면서 유신 체제가 갑자기 무너졌습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미뤄졌던 민주주의가 곧 올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이 시기를 서울의 봄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권력의 공백을 차지한 것은 국민이 아니었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 지휘권을 장악했습니다. 겉으로는 최규하 대통령의 과도정부가 있었지만 실질적인 힘은 이들에게 있었습니다.
1980년 봄 전국의 대학과 노동 현장에서 계엄 해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커졌습니다. 신군부는 이를 정권 장악의 명분으로 삼았습니다.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제주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하고 국회를 봉쇄했으며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과 재야인사를 체포했습니다. 대학에는 군이 들어갔습니다.
5월 18일 전남대 정문 앞에서 벌어진 일
계엄 확대 소식이 알려진 5월 18일 아침 전남대 학생들이 학교로 가려다 정문을 막은 계엄군과 마주쳤습니다. 항의하는 학생들에게 진압봉이 날아들었습니다. 학생들은 시내로 이동했고 금남로 일대에서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이날 광주에 투입된 병력은 공수특전여단이었습니다. 시위 진압 훈련을 받은 경찰이 아니라 전투 병력이 도심에 들어온 것입니다. 진압 방식은 곧바로 문제가 되었습니다. 시위 참가자뿐 아니라 길을 지나던 시민과 상인 학생까지 무차별로 구타당했습니다. 이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이 다시 거리로 나오면서 시위 규모는 빠르게 커졌습니다.
시위가 시민 전체로 번진 결정적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처음에는 학생들의 항의였지만 폭력을 본 시민들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5월 20일에는 택시와 버스 기사들이 차량 시위를 벌였고 수만 명이 금남로를 메웠습니다. 광주 전체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5월 21일 집단 발포와 시민군의 등장
5월 21일은 전환점입니다. 전남도청 앞에 모인 시민들을 향해 계엄군이 집단 발포했습니다. 무기를 들지 않은 사람들에게 군이 총을 쏜 것입니다. 사상자가 속출했습니다.
시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을 선택했습니다. 인근 지역의 예비군 무기고와 경찰서에서 총기를 확보해 시민군을 조직했습니다. 이날 오후 계엄군은 시내에서 물러나 광주 외곽으로 이동했고 도시를 봉쇄했습니다. 전화가 끊기고 도로가 막히면서 광주는 고립되었습니다.
주목할 부분은 계엄군이 빠진 뒤의 광주입니다. 행정이 마비되고 무기가 시중에 풀린 상태였지만 약탈이나 강력범죄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시민들은 주먹밥을 나누고 헌혈에 줄을 섰습니다. 수습대책위원회가 꾸려져 무기 회수와 협상을 논의했습니다. 이 며칠을 두고 절대공동체라는 표현이 쓰이기도 합니다.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
봉쇄가 이어지는 동안 협상은 진전되지 않았습니다. 시민군 내부에서도 무기를 반납하고 물러나자는 온건파와 끝까지 남자는 강경파의 의견이 갈렸습니다. 계엄군은 5월 26일 밤 최종 진압 작전을 준비했습니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했습니다. 전남도청에 남아 있던 이들은 대부분 젊은 학생과 노동자였습니다. 진압은 짧은 시간에 끝났습니다. 도청에서 마지막까지 방송으로 시민들에게 사실을 알리던 목소리는 이 사건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남았습니다. 열흘간의 항쟁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정부가 확인한 사망자는 백육십여 명이며 행방불명자와 부상 후 사망자 그리고 구속과 고문 피해자까지 포함하면 피해 규모는 수천 명에 이릅니다. 다만 정확한 희생자 수와 암매장 여부 발포 명령 계통 같은 핵심 사안은 아직도 완전히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진실이 인정되기까지 걸린 시간
신군부는 사건 직후 이 일을 폭동으로 규정했고 전두환은 그해 9월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광주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시기가 이어졌습니다. 그럼에도 유가족과 생존자 그리고 대학생들이 계속 진상 규명을 요구했고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거치며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1988년 국회 광주특별위원회 청문회가 열려 처음으로 공개 증언이 이루어졌습니다. 1995년에는 관련 특별법이 제정되어 공소시효 문제를 넘어 처벌의 길이 열렸고 1997년 대법원은 12·12와 5·18에 관해 전두환과 노태우 등에게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 등의 유죄를 확정했습니다. 같은 해 5월 18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습니다. 2011년에는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2020년대에도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활동하며 발포 경위와 행방불명자 문제를 다시 조사했습니다. 사십 년이 지나서도 조사가 필요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사건의 무게를 보여줍니다.
지금 이 사건을 다시 읽는 이유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특정 지역의 비극으로만 남지 않았습니다. 1987년 민주화의 직접적인 동력이 되었고 국가 폭력을 어떻게 기록하고 책임을 물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한국 사회에 남겼습니다. 이후 아시아 여러 나라의 민주화 운동에서도 참고 사례로 언급되어 왔습니다.
동시에 이 사건은 여전히 왜곡과 허위 정보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확인된 사실이고 무엇이 아직 조사 중인 사안인지 구분해 보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광주사태라는 옛 이름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지금의 이름 사이에 놓인 거리가 곧 이 사회가 진실을 되찾기 위해 걸어온 거리입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광주사태 #한국현대사 #서울의봄 #민주화운동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