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닌의 난, 후계자 다툼 하나가 교토를 잿더미로 만든 11년

후사가 없어 동생을 후계자로 삼았던 쇼군

무로마치 막부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오랫동안 자식을 얻지 못했습니다. 후계 문제를 서둘러 정리하고 싶었던 그는 출가해 있던 동생 요시미를 환속시켜 후계자로 삼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이 결정이 내려진 지 불과 일 년 만에 정실부인 히노 도미코가 아들 요시히사를 낳으면서 상황이 완전히 꼬여버렸습니다. 권력욕이 강했던 도미코는 당연히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여겼고 이미 후계자로 정해둔 동생과 갓 태어난 친아들 사이에서 요시마사는 갈팡질팡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요시마사 본인의 성격도 이 혼란을 키운 원인 가운데 하나였는데 그는 어린 시절부터 주변 인물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며 자라 우유부단하고 변덕스러운 성품으로 자라났습니다. 그가 여덟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쇼군 자리에 올라 제대로 된 제왕학을 배울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성장했다는 사정을 감안하면 이런 성격적 특징은 어쩌면 예견된 결과였는지도 모릅니다. 정치적 혼란과 잇단 농민 반란에 지친 그는 점차 국정을 등한시하고 다도와 정원 가꾸기 같은 취미에 몰두하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쇼군이 중심을 잡지 못하는 사이 후계 문제는 점점 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요시마사의 곁에는 어머니 히노 시게코를 비롯해 유모와 가신 등 여러 인물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그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데 이렇게 다양한 목소리에 둘러싸여 자란 그가 훗날 국가의 중대사 앞에서도 일관된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릅니다.

곳곳에서 동시에 터진 후계자 분쟁

문제는 이런 후계자 갈등이 쇼군 가문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 막부의 요직인 간레이를 대대로 맡아온 유력 가문 하타케야마 집안에서도 거의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주 하타케야마 모치쿠니는 아들이 없어 동생을 양자로 들였다가 뒤늦게 친아들 요시나리를 얻자 양자를 폐하고 친아들을 후계자로 삼았는데 이번에는 가문의 유력 가신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고 폐위된 양자의 아들을 옹립하며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쇼군 요시마사 본인의 상황과 놀랍도록 닮은 이 분쟁을 정작 요시마사가 나서서 조정해야 했지만 그는 한쪽 편을 들었다가 다시 반대편으로 입장을 바꾸는 등 오락가락하는 모습만 보였습니다. 여기에 더해 막부의 또 다른 유력 가문 시바 집안에서도 비슷한 가독 분쟁이 동시에 터졌고 토가시나 롯카쿠 같은 다른 슈고 가문들에서도 잇달아 상속을 둘러싼 다툼이 불거졌습니다. 이렇게 막부를 떠받치던 여러 핵심 가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후계 분쟁이 벌어지고 그때마다 쇼군의 중재가 일관성 없이 흔들리자 무로마치 막부에 대한 신뢰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실제로 하타케야마 가문의 요시나리는 한때 쇼군의 토벌군에게 근거지를 잃고 먼 지방으로 도망쳤다가 대사면령 덕분에 겨우 살아남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는데 이런 부침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그를 사면해준 쇼군 측근과 반대파 사이의 알력까지 더해지며 갈등의 골은 점점 더 깊어져만 갔습니다.

두 거두의 대립이 전면전으로 번지다

이렇게 쌓여가던 여러 갈래의 갈등은 결국 막부의 실력자였던 두 사람 호소카와 가쓰모토와 야마나 소젠의 대립으로 수렴되었습니다. 가쓰모토는 쇼군의 동생 요시미를 지지했고 소젠은 갓 태어난 쇼군의 친아들 요시히사를 지지하면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정적 관계로 돌아섰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두 사람이 처음부터 원수지간은 아니었다는 사실인데 한때는 서로 협력하는 사이였다가 여러 가문의 후계 분쟁에 각기 다른 편을 들며 개입하는 과정에서 점차 돌이킬 수 없는 대립 구도로 굳어져 갔습니다. 1467년 1월 결국 야마나 소젠의 회유에 넘어간 쇼군 요시마사가 입장을 바꾸면서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폭발했고 그해 5월 마침내 교토 시내에서 양측의 군대가 정면으로 충돌하며 전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막부 안에서 손꼽히는 실력자였던 만큼 이들이 완전히 등을 돌렸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예고하는 신호나 다름없었습니다. 호소카와 진영은 동군 야마나 진영은 서군으로 불리며 각각 전국의 슈고 다이묘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는데 이는 단순한 두 가문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의 영지를 넓히려는 야심을 품은 전국 각지의 다이묘들이 대거 가세하면서 순식간에 전국적인 규모의 내전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전투가 시작된 초반에는 무로마치 일대의 저택들이 잇달아 불타올랐는데 한쪽 진영의 저택이 습격당해 불타면 곧바로 다른 저택으로 전선이 옮겨가는 식으로 도시 곳곳이 순식간에 전쟁터로 바뀌어갔습니다. 심지어 정작 이 모든 사태의 발단이 된 쇼군 요시마사조차 전쟁 초반에는 양측에 화해를 명령했다가 곧이어 한쪽 편을 드는 등 오락가락하는 태도를 반복해 사태를 진정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혼란을 부채질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11년간 잿더미가 된 천년 고도

이렇게 시작된 전쟁은 무려 27만 명에 이르는 병력이 교토로 집결할 정도로 대규모로 번졌고 이후 11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당시 일본 전체 인구를 생각하면 이는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병력 동원이었으며 전국 각지의 다이묘들이 저마다 병사를 이끌고 상경하면서 정작 지방에서는 영주가 자리를 비운 사이 각종 치안 문제와 민심 이반이 뒤따르는 부작용까지 생겨났습니다. 주된 전장이 다른 어느 지방이 아닌 수도 교토 한복판이었다는 점이 이 전쟁의 가장 비극적인 대목입니다. 화려한 귀족 저택과 유서 깊은 사찰들이 늘어서 있던 도시는 전쟁이 이어지는 동안 곳곳에서 불타올랐고 결국 시가지 대부분이 잿더미로 변해버렸습니다. 실제로 이 전쟁을 거치며 교토는 완전히 파괴되어 성채로 둘러싸인 두 개의 좁은 구역 즉 상경과 하경이라는 형태로 쪼그라들었는데 지금도 교토에 이 지명이 남아 있는 것은 바로 이때의 상처가 지금까지 이어진 흔적입니다. 오랜 세월 쌓여온 귀중한 서적과 문화재 역시 이 전쟁의 화마 속에서 상당수가 소실되었습니다. 한 시대를 대표하던 문화 도시가 후계자 문제 하나로 촉발된 다이묘들의 세력 다툼 속에서 이토록 철저하게 파괴되었다는 사실은 지금 보아도 참담하게 느껴집니다. 오랜 세월 귀족과 사찰이 정성껏 가꾸어온 정원과 건축물들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한 번 불타 사라진 이 문화유산들은 이후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완전히 복원되지 못한 채 오닌의 난 이전과 이후 교토의 모습을 완전히 다른 도시로 갈라놓았습니다.

승자도 패자도 없이 무너진 막부의 권위

11년에 걸친 전쟁은 1477년 서군 세력이 하나둘 교토에서 철수하며 흐지부지 막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 오랜 전쟁 끝에 명확한 승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발단이 되었던 후계 문제조차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채 전쟁이 마무리되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도미코의 아들 요시히사가 9대 쇼군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그는 후사 없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결국 애초에 밀려났던 요시미의 아들이 훗날 10대 쇼군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십여 년간 나라 전체를 뒤흔든 전쟁의 결말이 이렇게 허무했다는 사실은 이 싸움이 애초부터 뚜렷한 명분이나 목표 없이 다이묘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굴러간 소모전에 가까웠음을 보여줍니다. 확실한 것은 이 전쟁을 거치며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가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는 사실뿐이었습니다. 쇼군이 나서도 지방의 다이묘들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난 이상 각지의 무사들은 더 이상 중앙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고 이후 일본 전역은 저마다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약육강식의 전국시대로 완전히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지방으로 흩어진 다이묘들은 각자의 영지로 돌아가 세력을 키우는 데 몰두했는데 한때 교토에 모여 서로 총칼을 겨누던 이들이 이제는 각자의 지역에서 독자적인 지배자로 군림하며 백여 년에 걸친 다이묘 간의 패권 다툼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작은 균열이 시대를 바꾼 이유

오닌의 난을 돌아보면 후계자를 둘러싼 사소해 보이는 갈등 하나가 어떻게 한 시대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었는지 잘 드러납니다. 이미 무로마치 막부는 쇼군 개인의 권위보다 여러 슈고 다이묘의 합의에 의존하는 취약한 구조를 안고 있었고 여기에 우유부단한 쇼군의 리더십과 여러 가문에서 동시에 터진 후계 분쟁이 겹치면서 작은 불씨 하나가 걷잡을 수 없는 큰불로 번지고 말았습니다. 일본의 근대 역사가 나이토 코난이 오늘날의 일본을 이해하려면 오닌의 난 이후 역사만 알면 충분하다고 단언했을 정도로 이 사건은 일본사 전체를 가르는 결정적인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교토라는 도시가 겪은 11년간의 참혹한 파괴는 결국 정치 지도자의 우유부단함과 권력 구조의 근본적인 취약함이 맞물릴 때 얼마나 거대한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쇼군 한 사람의 결단력 부족에서 시작된 혼란이 여러 가문의 해묵은 갈등과 뒤엉키고 여기에 각지 다이묘들의 영토 욕심까지 더해지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재앙으로 번질 수 있다는 이 오래된 교훈은 시대를 넘어서도 곱씹어볼 만한 울림을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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