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과 피로 새 시대를 연 막부 말기 이야기
일본 사람들은 막부 말기를 바쿠마쓰라고 부르며 유난히 좋아합니다. 드라마와 영화와 만화와 게임까지 이 시대를 다룬 작품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사카모토 료마와 신센구미 같은 이름은 우리에게도 꽤 익숙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가 사랑받는 이유는 낭만 때문만이 아닙니다. 불과 10여 년 사이에 수많은 젊은이가 자기가 옳다고 믿는 신념을 위해 칼을 뽑았고 서로를 베었고 스스로 목숨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막부 말기의 대결은 크게 두 편으로 나뉩니다. 한쪽은 존왕양이파입니다. 존왕은 천황을 받든다는 뜻이고 양이는 서양 오랑캐를 몰아낸다는 뜻입니다. 흑선의 위협에 굴복해 불평등 조약을 맺은 막부를 무능하다고 비판하며 천황 중심의 나라를 세우려 했습니다. 다른 한쪽은 좌막파입니다. 막부를 돕는다는 뜻으로 260년 넘게 일본을 이끌어 온 도쿠가와 막부를 지켜야 질서가 유지된다고 믿었습니다.
처음에는 말과 글로 다투던 두 세력은 곧 암살과 전쟁으로 치달았습니다. 오늘은 막부 말기 존왕양이와 좌막파가 어떻게 피를 흘리며 맞섰는지 그리고 그 끝에 무엇이 남았는지 시간 순서대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눈 내리는 사쿠라다몬에서 피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모든 갈등의 불씨는 조약이었습니다. 1858년 막부의 최고 책임자인 다이로 이이 나오스케는 천황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미국과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었습니다. 천황의 뜻을 무시했다는 사실에 전국의 무사들이 분노했습니다. 이이 나오스케는 반대하는 사람들을 힘으로 눌렀습니다. 다이묘와 귀족을 근신시키고 지사들을 붙잡아 처형했는데 이를 안세이 대옥이라고 합니다. 이때 조슈의 젊은 스승 요시다 쇼인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훗날 막부를 무너뜨리는 주역이 됩니다.
탄압은 복수를 불렀습니다. 1860년 3월 24일 밤새 눈이 내린 아침이었습니다. 에도성 사쿠라다몬 앞을 지나던 이이 나오스케의 행렬을 미토번 출신 낭인들이 중심이 된 18명의 무사가 습격했습니다. 호위 무사들은 눈을 막으려고 칼집에 덮개를 씌우고 있어서 제대로 칼을 뽑지도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막부의 최고 권력자가 수도 한복판에서 목숨을 잃은 이 사건을 사쿠라다몬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건은 막부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렸습니다. 막부의 최고 책임자도 칼 한 자루에 쓰러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후 천황이 있는 교토에서는 천벌을 내린다는 뜻의 덴추라는 이름으로 암살이 줄을 이었습니다. 막부에 협력하거나 개국을 주장한 사람들이 밤길에 목이 베여 강가에 내걸리기도 했습니다. 사람을 베는 데 능하다고 해서 히토키리라는 별명이 붙은 암살자들도 등장했습니다. 교토는 어느새 누구도 안심할 수 없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교토의 밤을 지배한 신센구미와 이케다야 사건
교토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좌막파도 칼을 들었습니다. 막부는 아이즈번의 번주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를 교토 치안 책임자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1863년 그 아래에서 낭인들로 이루어진 특수 경찰 조직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이 바로 신센구미입니다. 국장 곤도 이사미와 부장 히지카타 도시조 그리고 천재 검객 오키타 소지가 이끈 신센구미는 엄격한 규율로 유명했습니다. 규칙을 어기면 동료라도 할복을 명했고 내부 숙청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같은 해 교토에서는 정변이 일어났습니다. 아이즈와 사쓰마가 손을 잡고 존왕양이 운동의 중심이던 조슈 세력을 교토에서 몰아낸 것입니다. 쫓겨난 지사들은 숨어서 반격을 노렸습니다. 1864년 신센구미는 수상한 상인 한 명을 붙잡아 심문했습니다. 그는 바람 부는 밤에 교토에 불을 지르고 그 혼란을 틈타 천황을 조슈로 모셔 가려는 계획이 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1864년 7월 8일 밤 신센구미 약 30명이 두 조로 나뉘어 교토 시내를 뒤졌습니다. 곤도 이사미가 이끈 조가 여관 이케다야에서 지사 20여 명이 모여 있는 것을 찾아냈습니다. 증원군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던 곤도는 소수의 대원만 이끌고 안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좁은 여관 안에서 두 시간 가까이 칼싸움이 벌어졌고 지사 여러 명이 죽고 20여 명이 붙잡혔습니다. 이 이케다야 사건으로 신센구미의 이름은 전국에 알려졌습니다.
분노한 조슈는 같은 해 군대를 이끌고 교토로 쳐들어왔습니다. 조슈군은 천황이 사는 궁궐 문 앞에서 아이즈와 사쓰마 군대와 격돌했지만 크게 패했습니다. 이를 긴몬의 변이라고 합니다. 이 전투로 교토 시내에 큰불이 번져 수많은 집이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궁궐을 향해 총을 쏜 조슈는 역적으로 몰렸고 막부는 조슈를 정벌하는 군대를 일으켰습니다.
어제의 적이 동지가 된 삿초동맹과 료마의 죽음
그런데 이 무렵 존왕양이파 안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조슈는 시모노세키 해협을 지나는 서양 배에 포격을 가했다가 서양 연합 함대의 보복 공격을 받고 포대를 빼앗겼습니다. 사쓰마도 영국 함대와 싸우며 서양 무기의 위력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서양을 몰아낸다는 양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두 번은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서양을 배워 힘을 기르고 막부를 쓰러뜨려 새 나라를 세우자는 쪽으로 말입니다.
문제는 사쓰마와 조슈가 긴몬의 변에서 서로 칼을 겨눈 원수 사이였다는 점입니다. 이 두 번을 이어 준 사람이 도사 출신의 낭인 사카모토 료마입니다. 1866년 료마의 중재로 삿초동맹이 맺어졌고 같은 해 막부의 두 번째 조슈 정벌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막부의 무력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궁지에 몰린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1867년 정권을 천황에게 돌려주는 대정봉환을 선언했습니다. 전쟁 없이 권력을 넘기는 이 방안에는 료마의 구상도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료마는 새 시대를 보지 못했습니다. 1867년 12월 10일 교토의 간장 가게 오미야 2층에서 동료 나카오카 신타로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숨졌습니다. 그날은 료마의 서른세 번째 생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신센구미가 의심받았지만 막부의 또 다른 경찰 조직인 미마와리구미가 범인이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보신전쟁 끝까지 막부 편에 선 사람들
대정봉환에도 불구하고 사쓰마와 조슈는 막부 세력을 완전히 없애려 했습니다. 1868년 1월 교토 남쪽 도바와 후시미에서 옛 막부군과 새 정부군이 맞붙으며 보신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새 정부군이 천황의 군대를 상징하는 깃발을 내걸자 옛 막부군은 하루아침에 역적이 되었습니다. 요시노부는 싸움을 포기하고 에도로 돌아갔고 에도성은 가쓰 가이슈와 사이고 다카모리의 담판으로 피 흘리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항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새 정부는 교토에서 존왕양이 지사들을 탄압했던 아이즈번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1868년 가을 아이즈 와카마쓰성은 한 달 동안 포위되었습니다. 10대 소년들로 이루어진 백호대 일부는 이모리산에서 성이 불타는 것으로 잘못 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무사 집안의 여성들도 싸우거나 포로가 되지 않으려 자결했습니다. 결국 아이즈는 항복했습니다.
신센구미의 운명도 비극적이었습니다. 곤도 이사미는 붙잡혀 처형되었고 병을 앓던 오키타 소지도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히지카타 도시조는 끝까지 싸우며 북쪽 홋카이도의 하코다테까지 갔고 그곳에서 전사했습니다. 1869년 하코다테의 고료카쿠가 항복하면서 보신전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같은 시기 조선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일본이 피의 대결을 벌이던 1860년대 조선도 큰 격변을 겪었습니다. 1862년에는 진주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임술농민봉기가 일어났습니다. 1863년 어린 고종이 즉위하자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쥐고 세도 정치를 누르며 개혁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서양과의 통상을 거부했고 1866년 천주교 신자를 대거 처형한 병인박해와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공격한 병인양요가 이어졌습니다. 일본이 내전을 거쳐 개국과 근대화로 나아갈 때 조선은 문을 더 굳게 닫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막부 말기의 피가 남긴 것
막부 말기 존왕양이와 좌막파의 대결은 결국 막부의 몰락과 메이지 유신으로 끝났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승자가 된 존왕양이파가 정작 양이를 버리고 서양을 가장 열심히 배우는 개국파로 변했다는 사실입니다. 반대로 끝까지 막부를 지킨 아이즈와 신센구미는 역적의 오명을 쓰고 오랫동안 고통받았습니다. 역사는 승자의 편에서 기록되었지만 오늘날 일본에서는 패자였던 이들의 충성과 비극에도 많은 사람이 공감을 보냅니다.
막부 말기를 낭만적인 시대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신념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암살이 정당화되었고 10대 소년들까지 전쟁에 내몰렸습니다. 이 시기에 자리 잡은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은 이후 일본이 이웃 나라를 침략하는 길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막부 말기의 이야기는 격변의 시대에 옳고 그름이 얼마나 쉽게 뒤바뀌는지 그리고 그 대가를 가장 크게 치르는 것이 결국 젊은이들이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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