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지마(Dejima Nagasaki) 쇄국 일본이 서양에 열어 둔 단 하나의 창구, 15명 남짓한 네덜란드인이 갇혀 산 부채꼴 섬 이야기

부채꼴 인공섬 데지마는 왜 쇄국 일본의 숨구멍이라 불릴까요

일본 나가사키 항구에는 한때 바다 위에 떠 있던 작은 부채꼴 섬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데지마이고 영어로는 출구의 섬이라는 뜻의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네덜란드 상인들이 살던 이 섬은 1641년부터 1859년까지 네덜란드와의 무역이 이루어진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넓이는 자료에 따라 1.3헥타르에서 1.5헥타르 정도로 전하는데 축구장 두 개를 조금 넘는 크기입니다. 이 작은 땅에서 200여 년 동안 서양의 문물이 일본으로 흘러들었기 때문에 쇄국 일본의 숨구멍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제목에 쓴 유일하게 열린 창구라는 말은 조심해서 쓸 필요가 있습니다. 앞선 글에서 다룬 것처럼 막부는 쓰시마를 통해 조선과 사쓰마를 통해 류큐와 마쓰마에를 통해 아이누와 교역했고 같은 나가사키에서는 중국과도 교역했습니다. 데지마가 유일했던 것은 서양과의 교류였습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데지마를 서양에 열린 단 하나의 창구로 부르겠습니다.

이 작은 섬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그리고 이 섬이 일본에 남긴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씩 따라가 보겠습니다.

포르투갈인을 가두려고 지은 섬에 왜 네덜란드인이 들어왔을까요

데지마는 처음부터 네덜란드인을 위한 섬이 아니었습니다. 막부는 포르투갈인들을 좁은 곳에 모아 쉽게 관리하려고 나가사키의 부유한 상공업자 25명에게 명령해 1634년부터 1636년까지 이 섬을 만들게 했다고 전해집니다. 공사 비용은 상공업자들이 냈고 이후 포르투갈인들이 해마다 임대료를 내며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상황이 급변한 것은 1637년 시마바라의 난 이후였습니다. 막부는 가톨릭 포교를 문제 삼아 1639년에 포르투갈인들을 추방했고 데지마는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섬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섬에 돈을 댔던 유력자들의 불만이 커졌고 막부는 히라도에 있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상관을 이곳으로 옮기게 했습니다. 이때가 1641년입니다. 상관은 상인들이 머무르며 무역을 하는 건물과 사무 공간을 뜻합니다.

네덜란드가 남을 수 있었던 이유도 짚어야 합니다. 개신교 나라인 네덜란드는 포교에 관심이 없고 무역만 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도 조건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다르다는 점을 설명했고 선교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며 데지마를 벗어나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막부의 군사 정책에도 협조해야 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무역의 이익과 자유를 맞바꾼 계약이었던 셈입니다.

배가 없는 계절에 15명 남짓한 사람들은 이 좁은 섬에서 어떻게 살았을까요

네덜란드 배는 해마다 7월에서 8월 사이에 두 척이 들어왔고 12월에 떠났다고 합니다. 배가 머무는 동안에는 선원들로 섬이 북적였습니다. 하지만 배가 없는 계절에는 상관장과 부상관장과 서기와 창고지기와 목수와 조리사와 잡역을 하는 사람들까지 합쳐 15명 안팎만 남았다고 전해집니다. 축구장 두 개 크기의 섬에 이 정도 인원이 머문 셈입니다.

상관장은 일본에서 카피탄이라고 불렀습니다. 카피탄은 원래 포르투갈어로 영어의 캡틴과 같은 뜻인데 무역 상대가 포르투갈에서 네덜란드로 바뀐 뒤에도 일본에서는 이 호칭을 그대로 썼다고 합니다. 네덜란드에서 쓰던 오페르호브덴이라는 말은 일본에서 쓰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섬의 행정은 원칙적으로 일본 쪽 관리인 나가사키 부교가 맡았습니다. 허가받지 않은 일본인은 섬에 들어올 수 없었고 네덜란드 사람들도 원칙적으로 섬 밖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다만 유곽의 여성은 출입이 허용되었다는 서술이 있습니다.

말도 통제되었습니다. 외국인이 일본어를 배우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고 통역은 네덜란드어를 익힌 일본인 통역관을 부교가 직접 고용해 맡겼습니다. 네덜란드 쪽은 통역사를 스스로 고용할 권리도 없었다고 합니다. 통역관 자리는 세습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은 네덜란드인의 이상한 행동을 발견하면 부교소에 보고해야 했습니다. 섬 안의 소통 자체가 막부의 감시망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상관장의 에도 참부와 네덜란드 풍설서는 막부에게 무엇이었을까요

이렇게까지 통제하면서도 막부가 네덜란드를 내쫓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한 해설은 그 답을 정보에서 찾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배는 일본에 들어올 때마다 네덜란드 풍설서라는 해외 정보 보고서를 나가사키 부교에게 제출했다고 합니다. 상관장은 일 년에 한 번 에도를 찾아 쇼군을 만나고 무역을 허락받은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선물을 바쳤는데 이를 에도 참부라고 부릅니다. 이런 제도를 통해 막부는 유럽과 세계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고 설명됩니다.

1690년에 데지마에 온 독일인 엥겔베르트 켐퍼는 에도까지 올라가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를 만났습니다. 그는 일본이 데지마 상관을 유지한 목적이 교역보다 바깥 세계에 대한 정보를 얻는 데 있다고 단언했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이것은 외국인 관찰자 한 사람의 평가이므로 당시 막부의 속마음을 그대로 보여 준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무역보다 정보라는 해석이 여러 자료에서 반복해서 나온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이 섬이 쇄국 아래에서도 바깥 소식을 듣는 귀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쇄국이라는 말이 지나치게 단순한 표현이라는 이야기도 이해가 됩니다. 문을 닫되 창문 하나는 막부가 직접 쥐고 있었던 셈입니다.

같은 나가사키의 중국인들은 데지마와 어떻게 달랐을까요

같은 나가사키에는 중국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나가사키 시내에 머무를 수 있었는데 수천 명이 시내 곳곳에 체류하면서 도박과 마약 같은 문제가 생기고 밀무역이 성행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막부는 1689년에 중국인을 한곳에 모아 살게 하는 거주 구역인 도진야시키를 완성했습니다. 이곳은 데지마의 두 배쯤 되는 넓이였고 수천 명이 머물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처우의 차이입니다. 한 기행 기사는 네덜란드인에 비해 중국인들이 비교적 통행이 자유로웠다고 전합니다. 반면 국사편찬위원회의 우리역사넷은 일본이 네덜란드와 중국 상인들을 각각 격리해 일본인과의 자유로운 접촉을 막았다고 설명합니다. 두 집단이 누린 자유의 정도를 어떻게 표현하는지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확실한 것은 두 곳 모두 밀무역과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막부가 만든 격리 구역이었다는 점입니다.

이 점이 제목의 표현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데지마는 서양에 열린 유일한 창구였지만 나가사키가 서양인만의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나가사키는 서양의 소식과 중국의 소식이 함께 모이는 곳이었고 그중에서도 서양 쪽 통로가 바로 이 부채꼴 섬이었습니다.

데지마를 통해 들어온 난학과 지볼트는 일본에 무엇을 남겼을까요

이 섬을 통해 들어온 것은 물건보다 학문이었습니다. 네덜란드를 통해 들어온 서양의 학문과 기술과 문화를 난학이라고 부릅니다. 난학이라는 이름은 네덜란드의 중심 지역이던 홀란드를 한자로 옮긴 화란에서 따온 말이라고 합니다. 한 보도는 해시계 같은 기술과 커피와 식물 같은 서양 문화도 이 섬을 거쳐 전해졌다고 소개합니다.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양서에 대한 금지를 완화한 뒤에는 서양 서적이 의학과 천문학 연구를 촉진했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또한 난학이 훗날 근대 서구 문명이 갑자기 밀려올 때 충격을 줄이는 완충 구실을 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이것은 평가이므로 그렇게 보는 시각도 있다는 정도로 받아들이시면 좋겠습니다.

데지마를 상징하는 인물로는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를 꼽을 수 있습니다. 독일인 의사였던 그는 1824년에 나가사키에 나루타키주쿠를 열어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일본인에게 서양 의학을 직접 가르쳤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네덜란드인에게만 무역과 거주가 허락되었기 때문에 자신을 네덜란드 산골 출신이라고 속였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그러나 지볼트의 일본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지볼트는 일본에서 해외 반출이 금지된 일본 지도를 수집했다가 1829년에 발각되어 추방되었습니다. 지도를 건넨 다카하시 가게야스는 체포되어 조사를 받다가 옥사했다고 합니다. 지볼트는 일본인 여성 쿠스모토 타키와의 사이에 딸 쿠스모토 이네를 두었는데 막부가 혼혈 자녀의 출국까지 엄격히 막았기 때문에 딸은 일본에 남아야 했습니다. 1858년 일본과 네덜란드 사이에 통상 조약이 맺어지면서 추방령이 풀렸고 지볼트는 30년 가까이 지나 일본으로 돌아와 딸과 재회했습니다. 이네는 훗날 일본의 첫 여의사가 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섬이 육지가 된 뒤 데지마는 어떻게 다시 살아났을까요

데지마의 시대는 일본의 개항과 함께 끝났습니다. 1859년까지 이어진 독점적 무역이 막을 내렸고 섬은 무역 기지로서의 역할을 잃었습니다. 이후 항구를 넓히는 공사에서 주변이 메워졌고 1904년에는 항만 개량 공사로 육지와 이어지면서 섬의 모습을 잃었다고 합니다. 지금 도로에는 데지마의 범위를 표시한 징이 박혀 있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922년에 네덜란드 상관 옛터로 국가 지정 사적이 되었고 1951년부터 복원 계획이 시작되었습니다. 자료를 조사하고 땅을 사들이는 준비에만 45년이 걸려 1996년에야 첫 삽을 떴다고 합니다. 2000년에 건물 다섯 채를 복원했고 2006년에는 상관장의 저택을 포함한 건물들을 완성했으며 2016년 시점에는 열여섯 채가 복원되었습니다. 다만 매립으로 해안선이 크게 바뀌어서 옛 그림처럼 그대로 재현하지는 못하고 경계 구역에 해자 비슷한 물길을 파는 방식으로 옛 모습을 되살리고 있다고 합니다.

정리하면 데지마는 서양에 열린 단 하나의 창구였지만 그 문은 막부가 열쇠를 쥔 좁은 문이었습니다. 통역과 출입과 정보를 모두 통제하면서도 그 통로로 학문과 기술을 받아들인 것이 이 섬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이 작은 섬을 갇힌 곳으로 보시나요 아니면 열린 곳으로 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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