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도령(Haitorei Edict), 칼을 뺏긴 사무라이들은 어디로 갔나 경찰부터 홋카이도 개척민까지의 생존기

어느 날 갑자기 정부가 여러분의 직업과 월급 그리고 가장 아끼는 물건을 한꺼번에 가져간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1876년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바로 그런 일을 겪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허리에 차고 다니던 두 자루의 칼을 더 이상 찰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 명령을 폐도령이라고 부릅니다.

사무라이에게 칼은 무사의 영혼이라고 불릴 만큼 특별한 물건이었습니다. 칼을 찬 사람과 차지 않은 사람은 한눈에 신분이 구별되었습니다. 그런 칼을 빼앗긴 사무라이들은 그 뒤 어떻게 살았을까요. 누군가는 다시 칼을 들고 정부에 맞섰고 누군가는 경찰복을 입었으며 누군가는 얼어붙은 북쪽 땅으로 떠났습니다. 오늘은 폐도령 이후 흩어진 사무라이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1876년 3월 칼을 허리에서 풀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폐도령은 1876년 3월 28일에 발표되었습니다. 내용은 간단했습니다. 군인과 경찰처럼 제복을 입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공공장소에서 칼을 차고 다닐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칼을 집에 두는 것까지 금지한 것은 아니었지만 칼을 드러내고 다니는 모습은 거리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폐도령은 갑자기 나온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몇 년에 걸쳐 사무라이의 상징을 하나씩 없애 왔습니다. 1871년에는 상투를 자르고 서양식 머리를 해도 된다는 단발령이 나왔습니다. 칼을 차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도 이 무렵 함께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선택이었지만 폐도령에 이르러 칼을 찰 권리 자체가 사라진 것입니다.

정부가 이렇게 한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1873년 징병령으로 평민도 군인이 되는 시대가 열렸는데 여전히 칼을 찬 옛 무사들이 거리를 활보하면 새 질서가 자리 잡기 어려웠습니다. 폐도령은 사무라이의 마지막 특권을 거둬들여 모든 국민을 같은 선 위에 세우려는 조치였습니다.

칼보다 더 무서웠던 것은 녹봉의 끝이었습니다

폐도령이 사무라이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면 같은 해 8월에 나온 질록처분은 생계를 직접 흔들었습니다. 정부는 사무라이에게 대대로 지급하던 녹봉을 끊고 대신 몇 년 치에 해당하는 공채를 한 번에 나눠 주었습니다. 높은 신분의 사무라이는 제법 큰 금액을 받았지만 대다수를 차지한 하급 사무라이가 받은 공채는 그리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평생 칼과 학문만 배운 사람들이 갑자기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많은 사무라이가 공채를 밑천 삼아 장사를 시작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손님에게 머리를 숙이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고 계산에도 서툴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두고 사족의 상법이라는 말로 비꼬았습니다. 무사 출신이 하는 장사는 망하기 쉽다는 뜻입니다.

정부도 이 문제를 모른 척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족수산이라는 이름으로 옛 사무라이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돈을 빌려주어 공장을 세우게 하거나 황무지를 개간할 땅을 내주는 방식이었습니다. 일부는 자리를 잡았지만 많은 사람이 빚과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분노한 사무라이들은 다시 칼을 들었습니다

폐도령이 발표된 그해 가을 구마모토에서 첫 번째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서양식 개혁을 극도로 싫어하던 옛 사무라이들이 모여 만든 경신당이 정부군 진지를 기습한 것입니다. 이를 신푸렌의 난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서양 무기를 거부하고 칼과 창으로만 싸웠습니다. 폐도령에 대한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기습 초반에는 정부군 지휘관들이 목숨을 잃을 만큼 피해가 컸지만 반란은 하루 만에 진압되었습니다. 그러나 불씨는 꺼지지 않았습니다. 곧이어 후쿠오카의 아키즈키와 야마구치의 하기에서도 사무라이들이 잇따라 들고일어났습니다. 모두 짧은 시간 안에 정부군에게 제압되었습니다.

이 연쇄 반란의 마지막은 이듬해 규슈 남부에서 일어난 세이난 전쟁이었습니다. 사무라이들이 가장 크게 일으킨 이 반란마저 징병으로 모인 평민 군대에 패하면서 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반란을 택한 사무라이들은 대부분 전쟁터에서 쓰러지거나 처벌을 받았습니다.

경찰복과 군복을 입은 사무라이들도 많았습니다

모든 사무라이가 정부에 맞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새 국가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경찰이었습니다. 폐도령 이후에도 경찰은 칼을 찰 수 있었고 무술 실력과 규율을 갖춘 옛 사무라이는 경찰로 딱 맞는 인재였습니다. 특히 초창기 도쿄 경찰에는 사쓰마 출신 사무라이가 대거 들어갔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세이난 전쟁에서 드러났습니다. 정부는 경찰 가운데 칼을 잘 쓰는 사람들을 뽑아 발도대라는 부대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칼을 들고 반란군과 맞붙었습니다. 칼을 뺏긴 사무라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정부가 다시 칼을 든 사무라이 출신 경찰을 앞세운 것입니다. 전장 곳곳에서는 같은 고향 출신끼리 칼을 겨누는 일도 있었습니다.

군대 역시 중요한 진로였습니다. 병사는 평민으로 채웠지만 이들을 지휘하는 장교 자리에는 옛 사무라이 출신이 많았습니다. 관청의 관리와 학교 교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글을 읽고 쓸 줄 알고 유학 교육을 받은 사무라이는 근대 국가를 움직이는 데 꼭 필요한 인력이었습니다. 칼은 내려놓았지만 붓과 제복으로 자리를 옮긴 셈입니다.

홋카이도 개척지와 새로운 사업으로 떠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더 멀리 떠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정부는 북쪽의 홋카이도를 개척하고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둔전병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평소에는 땅을 일구는 농부로 살다가 일이 생기면 병사로 나서는 사람들입니다. 1875년 지금의 삿포로 근처 고토니에 첫 둔전병 마을이 세워졌고 초기에는 일자리를 잃은 옛 사무라이들이 많이 지원했습니다.

하지만 개척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사무라이는 원래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아니었고 홋카이도의 겨울은 혹독했습니다. 낯선 땅에서 나무를 베고 돌을 골라내며 밭을 만드는 일은 칼을 휘두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고생이었습니다. 버티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끝까지 남은 가족들은 오늘날 홋카이도 여러 도시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 개척은 그 땅에 원래 살던 아이누 사람들의 삶을 크게 흔들었다는 점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사업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도사 지역 하급 무사 집안 출신인 이와사키 야타로는 해운업으로 출발해 훗날 미쓰비시라는 거대한 기업을 일구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칼 대신 펜을 들었습니다. 도사 출신 이타가키 다이스케 등은 국민이 뽑은 의회를 만들라고 요구하는 자유민권운동을 이끌었고 여기에도 불만을 품은 옛 사무라이들이 많이 참여했습니다.

같은 시기 조선의 구식 군인들도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조선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1881년 조선 정부는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만들고 일본인 교관을 초빙했습니다. 좋은 대우를 받는 별기군과 달리 기존의 구식 군인들은 13개월이나 급료를 받지 못했습니다. 1882년 겨우 받은 쌀에 겨와 모래가 섞여 있자 분노가 폭발했고 이것이 임오군란입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밀려난 옛 군인들의 분노라는 점에서 일본 사무라이 반란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칼은 사라졌지만 사무라이 정신은 어떻게 남았을까요

폐도령으로 칼은 거리에서 사라졌지만 칼의 문화까지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할 일이 없어진 검술 사범들은 입장료를 받고 검술 시합을 보여주는 흥행을 열기도 했습니다. 경찰은 검술을 훈련 과목으로 받아들였고 이것이 오늘날 검도로 이어지는 중요한 길이 되었습니다. 칼을 만들던 대장장이들 가운데 일부는 부엌칼과 생활용 칼을 만들며 기술을 이어갔습니다.

폐도령 이후 사무라이들의 행로를 보면 근대화가 누구에게나 같은 기회는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경찰과 관리와 기업가로 성공한 사람도 있었지만 훨씬 많은 사람이 가난 속에 잊혀 갔습니다. 신분에 따른 특권을 없앤 것은 분명 필요한 변화였지만 그 과정에서 준비 없이 떠밀린 사람들의 고통도 컸습니다.

또 하나 짚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실제 사무라이 계급이 사라진 뒤 일본에서는 무사도라는 이름으로 사무라이 정신이 오히려 더 크게 포장되었습니다. 충성과 희생을 강조하는 이 이야기는 훗날 군국주의를 떠받치는 데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칼을 뺏긴 사무라이들의 이야기는 결국 한 계층의 몰락이자 새로운 신화의 시작이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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