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우에노 공원에 가면 짧은 유카타를 입고 강아지를 끌고 산책하는 커다란 남자의 동상이 있습니다. 표정은 편안하고 옷차림은 소박합니다. 이 동상의 주인공이 바로 사이고 다카모리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한때 일본 정부가 반역자라고 부르던 인물이었습니다. 자신이 세운 정부를 향해 군대를 일으켰고 결국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반역자의 동상이 수도 한복판에 서 있다는 것은 참 이상한 일입니다. 그만큼 사이고 다카모리의 삶은 한마디로 정리하기 어려운 모순으로 가득합니다. 그는 막부를 무너뜨린 혁명가였고 사무라이 계급을 없애는 개혁에 참여했으며 마지막에는 사무라이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오늘은 마지막 사무라이라고 불리는 사이고 다카모리가 어떤 길을 걸었는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가고시마의 가난한 하급 무사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1828년 사쓰마번의 중심지인 가고시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사무라이였지만 아주 낮은 신분이었고 형편도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세금 관련 일을 맡은 하급 관리였고 식구는 많았습니다. 어린 사이고는 동생들을 돌보며 일찍부터 살림의 무게를 알았습니다.
그의 인생을 바꾼 사람은 사쓰마의 영주 시마즈 나리아키라였습니다. 나리아키라는 서양 기술에 관심이 많고 인재를 알아보는 눈이 있던 개혁적인 영주였습니다. 젊은 사이고가 농정에 관해 올린 의견서가 그의 눈에 띄었고 사이고는 영주의 측근으로 발탁되었습니다. 신분이 낮은 사무라이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기회였습니다.
사이고는 영주의 뜻을 받들어 에도와 교토를 오가며 여러 번의 인물들과 교류했습니다. 이때 쌓은 인맥과 경험은 훗날 사이고 다카모리가 메이지 유신의 중심에 서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알아준 주군에게 평생 깊은 충성심을 가졌습니다.
두 번의 유배가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습니다
1858년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비슷한 시기 막부는 반대 세력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이고는 막부에 쫓기던 승려 겟쇼를 보호하려 했지만 사쓰마번은 그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궁지에 몰린 두 사람은 가고시마 앞바다에 함께 몸을 던졌습니다. 겟쇼는 숨졌고 사이고만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살아남은 사이고는 번의 결정으로 아마미오시마에 숨어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현지 여성과 가정을 꾸리고 아이도 얻었습니다. 몇 년 뒤 다시 불려 나왔지만 이번에는 새 실권자인 시마즈 히사미쓰의 뜻을 거슬러 도쿠노시마를 거쳐 오키노에라부지마로 유배되었습니다. 비바람이 들이치는 좁은 감옥 생활은 몸을 크게 상하게 할 만큼 가혹했습니다.
그러나 사이고는 이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습니다. 책을 읽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생각을 깊게 다듬었습니다.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경천애인이라는 말은 훗날 그의 삶을 상징하는 문구가 되었습니다.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온 경험이 그를 어떤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에도성을 피 없이 넘겨받은 유신의 영웅이었습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사이고는 사쓰마 군사를 이끄는 핵심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오랜 앙숙이던 조슈번과 손을 잡는 삿초 동맹에 참여했고 막부를 무너뜨리는 데 앞장섰습니다. 1868년 보신 전쟁이 시작되자 사이고는 신정부군을 이끌고 에도로 진격했습니다.
당시 에도는 백만 명이 넘는 사람이 사는 거대한 도시였습니다. 전면전이 벌어지면 수많은 시민이 목숨을 잃을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막부 측 대표 가쓰 가이슈가 사이고를 찾아와 담판을 벌였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믿고 조건을 조율했고 결국 에도성은 싸움 없이 신정부에 넘어갔습니다. 이 무혈 입성은 사이고 다카모리의 대담함과 포용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으로 지금도 이야기됩니다.
메이지 정부가 세워진 뒤 사이고는 한동안 고향으로 물러났다가 1871년 다시 중앙으로 불려 올라왔습니다. 그는 천황을 지키는 군대를 맡았고 번을 없애고 현을 설치하는 폐번치현을 뒤에서 힘으로 받쳐 주었습니다. 그의 무게감이 없었다면 영주들의 반발을 누르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정한론 논쟁은 왜 그를 정부 밖으로 밀어냈을까요
1871년 이와쿠라 도모미와 오쿠보 도시미치 등 정부 핵심 인사들이 서양 시찰을 떠났습니다. 사이고는 남아서 나라 살림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1873년 조선에 사절을 보내는 문제를 두고 큰 갈등이 벌어졌습니다. 사이고는 자신이 직접 사절로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이 주장이 조선을 무력으로 굴복시키자는 정한론의 흐름 속에서 나왔다는 점은 우리가 분명히 짚어야 할 부분입니다.
시찰에서 돌아온 오쿠보 도시미치는 이를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서양의 힘을 직접 본 그는 지금은 나라 안의 개혁이 먼저라고 판단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란 두 친구는 이 문제로 완전히 갈라섰습니다. 결국 사이고의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모든 관직을 내려놓고 가고시마로 돌아갔습니다. 그를 따르던 많은 사쓰마 출신 군인과 관리도 함께 정부를 떠났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사이고는 사학교를 세워 젊은 사무라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이 무렵 정부는 징병령과 폐도령 그리고 녹봉 폐지를 차례로 밀어붙였고 일자리와 자존심을 잃은 사무라이들의 분노는 사학교로 모여들었습니다. 사이고 본인은 조용히 사냥과 농사를 즐기며 지냈지만 그의 이름은 어느새 불만 세력의 상징이 되어 있었습니다.
시로야마에서 마지막 사무라이의 반란이 막을 내렸습니다
1877년 초 정부가 가고시마의 무기와 탄약을 옮기려 하자 사학교 학생들이 무기고를 습격했습니다. 여기에 정부가 사이고를 암살하려 했다는 소문까지 퍼지면서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달아올랐습니다. 사이고는 제자들을 외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정부에 따져 묻겠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병사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향했습니다. 이것이 세이난 전쟁의 시작입니다.
사이고군은 먼저 구마모토성을 포위했지만 정부군은 50일 넘게 버텨냈습니다. 이어 다바루자카에서는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습니다. 정부는 전국에서 병력과 물자를 끊임없이 보냈고 그 병사의 다수는 징병으로 모인 평민이었습니다. 사무라이의 자부심은 끝없이 밀려오는 보급과 병력을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사이고군은 패배를 거듭하며 규슈 곳곳을 떠돌았습니다.
결국 살아남은 수백 명은 가고시마로 돌아와 시로야마 언덕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정부군은 수만 명의 병력으로 언덕을 에워쌌습니다. 1877년 9월 24일 새벽 총공격이 시작되었고 사이고는 산을 내려가다 총탄에 맞았습니다. 그는 곁에 있던 벳푸 신스케에게 이만하면 됐다는 뜻의 말을 남겼고 그의 손에 생을 마쳤다고 전해집니다. 마지막 사무라이의 반란은 이렇게 끝났고 일본에서 사무라이가 무력으로 일어서는 시대도 함께 막을 내렸습니다.
같은 해 조선에서는 흥선대원군이 물러났습니다
사이고가 정한론 논쟁에서 밀려난 1873년 조선에서도 권력 지형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10년 동안 나라를 이끈 흥선대원군이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물러나고 고종이 직접 정치를 시작한 것입니다. 대원군이 지켜온 강경한 통상 거부 정책도 이후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일본이 조선 문제로 다투던 바로 그해 조선은 스스로의 방향을 다시 고민하는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반역자에서 국민 영웅이 된 사이고를 어떻게 봐야 할까?
사이고 다카모리가 죽은 뒤에도 사람들은 그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가 살아서 어딘가로 떠났다는 전설까지 돌았습니다. 결국 1889년 헌법 반포와 함께 그는 사면을 받아 명예를 되찾았고 1898년 우에노 공원에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의 가쓰모토라는 인물도 그를 모델로 삼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권력을 가진 뒤에도 소박하게 살았고 욕심을 부리지 않았으며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습니다. 부패한 정치에 실망한 사람들에게 그는 깨끗한 지도자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를 바라볼 때는 조금 더 균형이 필요합니다. 그의 반란은 결국 수많은 젊은이의 목숨을 앗아간 내전이었습니다. 또한 정한론과 얽힌 그의 행보와 사상은 훗날 일본의 대외 팽창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의리와 순수함의 영웅으로 기억되지만 이웃 나라의 시선에서는 쉽게 박수를 칠 수 없는 인물입니다. 사이고 다카모리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그의 인간적인 매력과 역사적인 그림자를 함께 보는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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