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쇄국정책(Sakoku Japan Isolation Policy) 200여 년, 에도 막부는 왜 문을 닫았고 정말 다 닫았을까

쇄국정책 250년이라는 말은 얼마나 정확한 표현일까요

1853년 7월 8일 미국 해군이 군함 네 척을 이끌고 에도만에 들어와 무역을 시작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이때 나타난 배를 일본에서는 검은 배라고 부릅니다. 이 배가 나타나기 전까지 일본은 서양에 굳게 문을 닫은 나라로 알려져 있었고 그 닫힌 시간을 우리는 쇄국정책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합니다.

흔히 이 쇄국이 250년 동안 이어졌다고 말하지만 기록을 따라가 보면 숫자가 조금 다릅니다.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1633년부터 1639년까지 다섯 차례 쇄국령을 내렸고 이 체제는 1854년 미국과 에도 막부가 미일 화친 조약을 맺으면서 막을 내렸습니다. 첫 쇄국령을 기준으로 하면 220여 년이고 마지막 쇄국령인 1639년을 기준으로 하면 약 215년입니다. 250년이라는 숫자는 에도 시대 전체 기간과 섞여 굳어진 것으로 보이며 이 글에서는 기록으로 확인되는 200여 년이라는 표현을 쓰겠습니다.

게다가 쇄국이라는 단어는 정책이 만들어질 때 쓰던 말도 아니었습니다. 나가사키 출신의 난학자 시즈키 다다오가 1801년에 유럽 서적을 옮기며 만든 새 단어였고 널리 퍼진 것은 메이지 시대 이후라고 전해집니다. 이름부터 후대의 시선이 섞여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막부가 왜 문을 닫았는지 그리고 정말 모든 문을 닫았는지를 차례로 짚어보겠습니다.

문을 닫기 전의 일본은 얼마나 열려 있었을까요

전국 시대의 일본은 중앙 정부의 힘이 약해서 지방 세력들이 저마다 포르투갈과 영국과 네덜란드 같은 유럽 나라들과 무역을 했습니다. 일본인들도 동남아시아로 나아가 곳곳에 일본인 마을을 세웠는데 이를 니혼마치라고 부릅니다. 야마다 나가마사라는 인물은 시암의 국왕에게 영지를 받아 현지 일본인 거주지의 영주로 활동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덴쇼 소년사절단은 유럽까지 건너가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를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이 정도로 바깥 세계와 부지런히 오가던 나라였기에 이후의 방향 전환은 더욱 극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리스도교도 이런 열린 분위기 속에서 들어왔습니다. 16세기 중엽 포르투갈을 통해 전해져 규슈를 중심으로 퍼졌습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에도 막부는 점차 이 종교를 위협으로 보고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바깥으로 활짝 열려 있던 문이 좁아지기 시작한 출발점이 바로 여기였습니다.

1633년부터 1639년까지 다섯 번 내려진 쇄국령에는 무엇이 담겼을까요

쇄국은 하루아침에 선포된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조여 온 정책이었습니다. 1631년에는 호쇼센 제도가 시작되어 해외로 나가는 배를 막부가 통제하기 시작했고 1635년에는 일본인의 해외 항해가 금지되었습니다. 1639년에는 포르투갈 배가 일본에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이렇게 외국 선박의 출입은 막부가 통제하는 체제로 굳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눈에 띄는 공간이 나가사키의 데지마입니다. 데지마는 1634년부터 2년에 걸쳐 만든 부채꼴 모양의 인공섬으로 넓이가 약 1만 3천 제곱미터에 불과했습니다. 원래는 포르투갈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 관리하려고 막부가 나가사키의 부유한 상공업자들에게 짓게 한 시설이었습니다. 그런데 1639년에 포르투갈 사람들이 추방되면서 섬이 비었고 투자했던 나가사키 유력자들의 불만이 커지자 히라도에 있던 네덜란드 상관이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1641년부터 1859년까지 네덜란드와의 무역은 오직 이곳에서만 허용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아픈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1639년에 일본 여성과 네덜란드나 영국 상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어머니와 함께 지금의 자카르타에 있던 바타비아로 추방되었습니다. 이들이 고향의 가족과 친구에게 보낸 편지는 자가타라 편지라는 이름으로 전해집니다. 정책의 조문 뒤에는 이렇게 삶의 터전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시마바라의 난은 막부에게 무엇을 깨닫게 했을까요

쇄국을 결정적으로 강화한 계기는 1637년에 터진 시마바라의 난이었습니다. 일본의 그리스도교 세력이 막부의 통치에 반발해 일으킨 난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외국 세력과 이어져 있다는 두려움이 그만큼 컸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흥미로운 것은 같은 유럽 나라라도 대우가 달랐다는 점입니다. 가톨릭을 믿는 포르투갈은 선교 활동 때문에 쫓겨났지만 개신교 나라인 네덜란드는 포교 없이 무역만 원했기 때문에 남을 수 있었습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를 설명했고 선교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며 데지마를 벗어나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막부의 군사 정책에도 협조하는 등 번거로운 조건을 받아들인 뒤에야 제한적인 무역을 허가받았습니다.

통제는 언어에도 미쳤습니다. 데지마의 외국인은 일본어를 배우는 것이 원칙적으로 금지되었고 통역은 나가사키 부교가 네덜란드어를 익힌 일본인 통역관을 따로 고용해 맡겼습니다. 서양과 이어진 좁은 통로는 이렇게 철저하게 막부의 손을 거치는 구조였습니다.

종교 못지않게 무역 이익과 지방 영주 통제도 이유였을까요

막부가 문을 좁힌 이유를 종교 하나로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한 해설에 따르면 전국 시대처럼 무역을 내버려 두면 그 막대한 이익을 지방 세력들이 가져가게 되고 무역으로 돈을 모으고 새 무기를 손에 넣은 영주들이 막부에 맞설 수도 있다고 막부가 우려했습니다. 실제로 센다이의 다테 마사무네는 서양식 배를 만들고 사절단을 유럽에 보내 무역 협상을 추진했습니다. 오늘날에는 당시 일본의 국제성을 보여 주는 사례로 소개되지만 막부의 눈에는 막부를 건너뛴 독자 외교로 보일 수 있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또 다른 설명은 막부가 그리스도교의 확산을 막으려는 목적과 함께 조선과 류큐와 네덜란드를 통해 중국 대륙과 동남아시아로 이어지는 무역로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런 방침을 정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문을 닫아도 필요한 물건은 들어올 길이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두 설명을 합치면 쇄국은 대외 관계를 끊는 결정이라기보다 누가 어디서 얼마나 교역할지를 막부가 정하겠다는 결정에 가까웠다고 저는 봅니다. 그리고 훗날 서양 문물을 독자적으로 받아들여 힘을 키운 조슈번과 사쓰마번이 막부 체제를 무너뜨리는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에 막부의 우려가 결과적으로 현실이 되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문을 닫았다는 말과 달리 네 개의 창구는 열려 있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쇄국이 정말 모든 문을 닫는 일이었다면 일본은 이웃 나라와도 끊어졌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록은 다르게 말합니다. 막부는 쓰시마섬을 통해 조선과 교류했고 나가사키를 통해 네덜란드와 중국과 교역했고 사쓰마번을 통해 류큐와 이어졌고 마쓰마에번을 통해 에조 곧 아이누와 교역했습니다. 이 네 곳을 네 개의 입구라는 뜻으로 욧츠노구치라고 부릅니다.

류큐는 일본과 중국을 잇는 이중 교역 창구 역할을 했습니다. 류큐는 은을 수출했고 막부는 류큐로부터 설탕이나 중국산 견제품을 수입했습니다. 나가사키 항구는 네덜란드 배와 중국 배로 붐볐고 중국 배는 1635년부터 나가사키에 많이 들어왔습니다. 조선과의 교류는 조선 통신사라는 공식 제도를 통해 정권 차원에서 이어지면서 오히려 이전보다 더 안정적이고 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서양의 지식도 완전히 끊기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해마다 한 번 쇼군에게 국제 정세를 설명한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서양을 이해했고 난학이라고 불리는 네덜란드 학문이 퍼졌습니다. 다만 난학이 사회의 주류 학문은 아니었고 유학이 여전히 중심이었으며 난학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아 탄압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 때문에 일본에서도 쇄국이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쓰고 쇄국 등 막부의 대외 정책이라는 절충된 표현을 쓰기로 했다고 전해집니다.

문이 열린 뒤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고 우리는 무엇을 읽어야 할까요

1853년 검은 배가 나타난 뒤 1854년 미일 화친 조약으로 쇄국은 끝났습니다. 이는 조선이 개항하는 시기보다 20여 년 이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개항은 순조로운 출발이 아니었습니다. 1858년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을 맺은 뒤 서양과의 교역이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일본의 경제와 통화 체계가 무너졌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막부의 손을 거쳐 걸러지던 바깥 세계가 한꺼번에 밀려든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쇄국은 실패한 정책이었을까요 아니면 성공한 정책이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두 얼굴을 모두 가졌습니다. 그리스도교와 지방 세력을 통제하며 쇄국 체제를 200여 년 동안 유지했다는 점에서는 목적을 이룬 정책이었습니다. 하지만 바깥 세계의 변화 속도를 따라잡기 어려웠다는 한계는 개항 뒤의 혼란이 보여 줍니다.

한국의 독자에게는 이 이야기가 남의 나라 역사만은 아닙니다. 조선도 서양과의 통상을 거부한 시기가 있었고 그 뒤 원치 않는 방식으로 문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두 나라의 경험을 나란히 놓고 보면 문을 닫는 결정만큼 언제 어떻게 여느냐가 중요했다는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확실한 것은 일본의 쇄국이 문을 걸어 잠그는 일이라기보다 열쇠를 누가 쥘 것인가를 정하는 일에 가까웠다는 점입니다. 여러분은 쇄국을 고립으로 보시나요 아니면 관리된 개방으로 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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