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을 품에 안았던 소년의 시작
일본 전국시대를 통틀어 이만큼 극적인 신분 상승을 이룬 인물은 없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와리 지방의 평범한 농민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사찰에 맡겨졌다가 쌀가게와 대장간을 전전하며 견습생 생활을 했고 열다섯 무렵에는 바늘을 팔러 다니기도 했습니다. 무사 가문 출신도 아니었고 이렇다 할 배경도 없었습니다. 훗날 일본을 통일하는 인물이 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인생을 바꾼 계기는 오다 노부나가를 섬기게 된 일이었습니다. 처음 맡은 일은 하급 하인이나 다름없는 자리였습니다. 신발지기로 일하던 시절의 일화는 지금도 그의 성실함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자주 언급됩니다. 추운 겨울날 주인이 신을 신발을 미리 품속에 넣어 따뜻하게 데워 놓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소해 보이지만 상대의 마음을 미리 헤아리는 세심함이 있었다는 뜻이고 이런 태도가 결국 노부나가의 눈에 들게 된 발판이 되었습니다.
히데요시는 이후 하급 무사로 신분이 바뀌었고 크고 작은 전투에서 눈에 띄는 공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아자이 가문과의 전투에서 퇴각하는 노부나가군의 후위를 자청해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한 일화는 그의 담대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이런 공적이 쌓이며 그는 하시바라는 성을 받고 어엿한 영주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농민의 아들이 다이묘가 되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혼노지의 변 그리고 순식간에 찾아온 기회
히데요시의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은 그가 만든 것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찾아온 사건이었습니다. 1582년 노부나가가 서쪽의 모리 가문을 공략하는 임무를 맡겨 히데요시는 빗추 지방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교토에서 상상하지 못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노부나가가 자신의 부하였던 아케치 미쓰히데의 반란으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보통의 장수라면 큰 혼란에 빠졌겠지만 히데요시의 대응은 놀라울 정도로 신속했습니다. 그는 대치 중이던 모리 가문과 서둘러 화친을 맺고 곧바로 군대를 돌렸습니다. 훗날 주코쿠 대회군이라 불리는 이 이동은 당시로서는 상식을 뛰어넘는 속도였습니다. 며칠 만에 대군을 이끌고 교토 인근까지 돌아온 것입니다. 이 신속함이 없었다면 아마 다른 가신이 먼저 미쓰히데를 처단하고 노부나가의 후계자 자리를 차지했을지도 모릅니다.
교토 인근 야마자키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히데요시는 미쓰히데의 군대를 완전히 격파했습니다. 명분에서 밀린 미쓰히데는 애초에 지지 세력을 제대로 규합하지도 못한 상태였고 병력에서도 열세였습니다. 승리한 히데요시는 곧바로 노부나가의 후계 구도에 뛰어들었습니다. 오다 가문의 적통이라 할 만한 인물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그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 경쟁자들을 하나씩 밀어내며 실질적인 후계자 자리를 굳혀 나갔습니다.
일본 통일을 완성한 남자
노부나가가 세상을 떠난 뒤 일본은 여전히 여러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히데요시는 이 조각난 판도를 하나씩 정리해 나가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처음에는 오다 가문의 옛 동료들과 경쟁해야 했고 이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만만치 않은 상대와도 맞서야 했습니다. 결국 이에야스는 완전한 대결 대신 히데요시의 우위를 인정하는 쪽을 선택했고 이로써 히데요시는 사실상 최대 라이벌을 정치적으로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후 규슈와 시코쿠 그리고 관동 지방의 유력 가문들까지 차례로 굴복시키며 그는 마침내 일본 전역을 하나의 권력 아래 통일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시작한 통일 사업을 완성한 셈이었습니다. 히데요시는 조정으로부터 관백이라는 최고위 관직을 받았고 이후 도요토미라는 성까지 하사받으며 명실상부한 일본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무사 가문 출신이 아닌 인물이 관백에 오른 것은 그때까지 전례가 없던 일이었습니다.
권력을 잡은 히데요시는 여러 제도적 개혁도 함께 추진했습니다. 전국의 토지를 조사해 통일된 기준으로 파악하는 정책을 시행했고 농민과 무사의 신분을 명확히 구분해 농민이 무기를 소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도 내렸습니다. 이런 정책들은 오랜 전란으로 흐트러졌던 사회 질서를 다시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임진왜란과 허무했던 말년
권력의 정점에 오른 히데요시였지만 그의 말년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통일을 완성한 이후 그는 대륙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1592년 조선을 침공하며 시작된 이 전쟁은 이후 7년 가까이 이어지며 조선 땅을 초토화시켰습니다. 왜 이런 무리한 전쟁을 벌였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합니다. 다이묘들의 힘을 대외 전쟁으로 소진시켜 내부 반란을 막으려 했다는 설도 있고 늦게 얻은 아들을 잃은 충격에서 비롯된 과대망상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전쟁이 명분도 실익도 없이 조선과 일본 모두에 깊은 상처만 남긴 채 끝났다는 사실입니다.
가정사도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후계자로 삼았던 조카 히데쓰구를 훗날 친아들 히데요리가 태어나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숙청해 버렸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후계 구도의 안전판을 스스로 없애 버린 셈이었습니다. 1598년 히데요시는 위암으로 추정되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순두 해의 삶이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그가 남긴 시는 이슬처럼 사라지는 자신의 삶과 화려했던 권세마저 결국 꿈속의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허무함을 담고 있습니다.
농민의 성공담이 남긴 두 얼굴의 유산
히데요시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우려는 그대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어린 아들 히데요리는 아버지의 권력을 물려받기에는 너무 어렸고 이를 뒷받침할 세력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며 실권을 장악했고 도요토미 가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권력이 정작 자신의 핏줄에게는 이어지지 못한 셈입니다.
오늘날 일본에서 히데요시는 입신출세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미천한 신분에서 최고 권력자에 오른 그의 여정은 신분 사회였던 당시로서는 파격 그 자체였고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는 성공 신화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무리한 전쟁으로 이웃 나라에 깊은 상처를 남긴 인물이기도 합니다. 특히 조선의 입장에서 그는 결코 미화될 수 없는 침략의 원흉으로 기억됩니다. 한 인물을 두고 이렇게 상반된 평가가 공존한다는 사실 자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인물의 삶이 얼마나 복잡한 궤적을 그렸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농민의 아들이 천하를 손에 쥐었던 이야기는 감탄스럽지만 그 권력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함께 돌아볼 때 비로소 이 인물의 전체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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