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Great Kanto Earthquake Massacre of Koreans), 유언비어 한 마디가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1923년 9월의 진실

거짓말 한 줄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10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은 바로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역사입니다. 땅이 흔들리고 집이 불타던 극한의 공포 속에서 어제까지 인사를 나누던 이웃이 하루아침에 죽창과 몽둥이를 든 무리로 변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떤 과정으로 번졌으며 지금은 어떤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지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1923년 9월 1일 점심시간에 대지진이 도쿄를 덮쳤습니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 도쿄와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한 관동 지역에 규모 7.9의 강진이 발생했습니다. 마침 점심을 준비하던 시간이라 집집마다 불을 쓰고 있었고 지진이 멈추자마자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목조 건물이 빽빽하던 도심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는 10만 명을 훌쩍 넘었다고 전해지며 집을 잃은 사람은 수백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일본은 전쟁 뒤의 불황으로 사회 분위기가 몹시 어수선했습니다. 조선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고 일본에는 돈을 벌러 건너간 조선인 노동자와 공부하러 간 유학생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3.1 운동 이후 일본 사회 일각에서는 조선인을 불온한 사람들로 보는 편견이 퍼져 있었습니다. 재난으로 마음이 무너진 사람들에게 이 편견은 불쏘시개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우물에 독을 탔다는 말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요

지진 당일 밤부터 조선인이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을 풀며 폭동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문에는 어떤 근거도 없었습니다. 문제는 이 말이 시민들 입에서만 퍼진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경찰 조직의 연락망을 타고 소문이 더 넓게 퍼졌고 정부는 9월 2일 도쿄와 인근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군대가 거리로 나오자 사람들은 정말로 큰 위험이 닥쳤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더 충격적인 대목은 지방 관청의 움직임입니다. 어느 지역에서는 군청이 마을에 자경단을 만들라고 지시한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훗날 그 마을 촌장은 군청의 지시를 따랐을 뿐이라며 항의했고 재판 비용까지 보조를 받았다고 합니다. 결국 유언비어는 우연히 번진 소문이 아니라 불안을 다스리지 못한 권력의 방치와 가담 속에서 힘을 얻은 셈입니다.

자경단의 칼끝은 어떻게 이웃을 향했을까요

마을마다 자경단이라는 이름의 민간 조직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들은 죽창과 몽둥이와 일본도를 들고 길목을 막은 채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아 검문했습니다. 조선인인지 가려낸다며 가기구게고처럼 조선어 화자가 발음하기 어렵다고 여겨진 단어를 읽게 했고 십오엔 오십전 같은 말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발음이 어색하면 곧바로 폭행과 살해로 이어졌습니다. 경찰과 군인이 직접 학살에 가담했다는 증언과 기록도 여럿 남아 있습니다.

이 광기는 조선인만 겨누지 않았습니다. 조선인으로 오해받은 중국인과 일본인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9월 6일 지바현 후쿠다 마을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시코쿠 가가와현에서 약을 팔러 온 행상 15명 가운데 아이와 임신한 여성을 포함한 9명이 마을 주민 100여 명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이들의 사투리를 조선말로 착각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가해자 8명이 붙잡혀 형을 받았지만 얼마 뒤 사면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증오가 한번 불붙으면 누가 표적이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교훈이 이 사건에 담겨 있습니다.

학살은 도쿄 한 곳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가나가와현과 사이타마현 지바현 같은 주변 지역으로 번졌고 강가와 철길 옆 공터 같은 곳에서 많은 조선인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일본 군 부대가 작성한 보고서에서도 조선인을 죽였다는 기록이 확인되었는데 사이타마현에서만 확인된 희생자가 최소 193명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족이 있는 이웃이자 노동자였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희생자는 몇 명이었을까요 숫자가 서로 다른 이유

학살 희생자 수는 지금도 정확히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상하이에서 발행된 독립신문은 조선인 희생자를 6661명으로 보도했습니다. 일본의 지식인 요시노 사쿠조의 조사에서는 2600명 남짓이라는 수치가 나왔고 일본 정부의 보고서에는 형사 처벌이 이루어진 사건을 기준으로 230여 명이 살해되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숫자가 이렇게 다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일본 당국이 학살의 규모를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료를 감추거나 줄이려 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인 시신은 서둘러 묻히거나 강에 던져졌고 가족이 일본에 없어 신고조차 못 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최근까지도 새로운 자료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2016년에는 도쿄의 위령 시설 보관 자료에서 조선인으로 추정되는 71명의 명부가 확인되어 한국 쪽 기록과 맞춰 보는 작업이 이어졌습니다. 앞으로 조사가 더 진행되면 희생자 수가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옵니다.

같은 시기 조선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요

1923년 조선에서는 3.1 운동 이후 민족운동이 다양한 방식으로 뻗어 나가던 중이었습니다. 1월에는 의열단이 조선혁명선언을 내놓았고 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 설립 운동이 이어졌고 4월에는 진주에서 형평운동이 시작되었으며 5월에는 첫 어린이날 행사가 열렸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 9월 학살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 사회는 큰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100년이 지나도 이 기억을 둘러싼 다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일본 정부 안에서도 이 사건을 다룬 문서가 있습니다. 내각부 중앙방재회의가 정리한 관동대지진 보고서에는 유언비어로 인한 조선인 살해가 자경단뿐 아니라 군과 경찰에 의해서도 벌어졌다는 취지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2023년에는 일본 최대 일간지 요미우리신문이 유언비어와 폭력이 한꺼번에 퍼진 100년 전의 교훈을 짚는 연재 기사를 내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가나가와현 지사가 올린 54쪽 분량의 보고서 같은 당시 공문서도 공개되어 학살의 구체적인 정황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해 일본 정부 대변인인 관방장관은 정부 조사에서는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취지로 말해 논란이 일었습니다. 도쿄 요코아미초 공원에는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가 있어 해마다 9월 1일 추도식이 열리지만 도쿄도지사는 2017년부터 추도문을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희생자 규모를 두고 이견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유언비어를 믿은 사람들이 조선인을 집단으로 살해했다는 핵심 사실 자체를 부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한국과 일본 연구자들의 대체적인 견해입니다.

유언비어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은 지나간 먼 나라의 비극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재난이 닥치면 사람들은 불안해지고 불안은 누군가를 탓하고 싶은 마음으로 번지기 쉽습니다. 그 마음 위에 확인되지 않은 말이 얹히고 권력이 그것을 바로잡지 않으면 비극은 되풀이될 수 있습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도 구마모토 지진 때 동물원 사자가 탈출했다는 거짓 소문이 돌았던 일을 들며 오늘날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고 지적했습니다. 지금은 소문이 단 몇 분 만에 전국으로 퍼지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합니다. 불확실한 소식을 받으면 퍼뜨리기 전에 출처를 확인하고 특정 집단을 향한 분노 섞인 말에는 한 번 더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스러진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의 진실을 정확히 아는 일이 같은 참극을 막는 가장 확실한 첫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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