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군국주의 (Japanese Militarism and the February 26 Incident), 청년 장교들의 반란이 일본을 전쟁으로 몰아넣은 진짜 이유

총리가 대낮에 총에 맞아 숨졌는데 범인들에게 쏟아진 것은 비난이 아니라 응원이었습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1932년 일본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입니다. 재판부에는 선처를 바라는 탄원서가 11만 건이나 날아들었고 어떤 이들은 혈서까지 써서 보냈다고 합니다. 일본 군국주의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괴물이 아니었습니다. 청년 장교들의 총성과 그것을 지켜본 사회의 침묵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 군국주의가 어떻게 폭주하기 시작했는지 그 중심에 있던 청년 장교들의 반란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굶주리는 고향을 본 청년 장교들은 왜 총을 들었을까요

1920년대 일본은 정당이 내각을 이끄는 이른바 다이쇼 민주주의의 시대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29년 세계 대공황이 터지자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일본에서도 쌀값과 생사 값이 폭락했고 특히 동북 지방의 농촌은 끼니를 잇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딸을 팔아야 하는 집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신문에 오르내렸습니다.

문제는 군대의 병사 대부분이 바로 그 농촌 출신이었다는 점입니다. 청년 장교들은 부하들의 편지를 읽으며 고향의 참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반면 정치인과 재벌은 부패했고 자기 배만 불린다고 보였습니다. 이들은 천황 중심의 나라를 다시 세워야 한다고 믿었고 그 길을 막는 사람들을 없애는 것이 충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분노는 컸지만 방향은 끔찍하게 틀려 있었습니다.

메이지 헌법에 숨어 있던 약점이 군부에 힘을 실어 주었습니다

군부가 폭주할 수 있었던 데에는 제도의 허점도 컸습니다. 메이지 헌법 아래에서 군대를 움직이는 통수권은 내각이 아니라 천황에게 속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부가 군대를 직접 통제하기 어려웠습니다. 여기에 육군대신과 해군대신은 현역 군인만 맡을 수 있다는 규칙이 더해졌습니다. 군부가 대신을 내지 않으면 내각이 아예 만들어지지 않으니 군부는 마음만 먹으면 내각을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하극상 풍조였습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밀어내고 제멋대로 일을 벌여도 결과만 좋으면 눈감아 주는 문화가 군대에 퍼져 있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청년 장교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일이라면 명령을 어겨도 괜찮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1930년 런던 해군군축조약 때는 이 약점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가 군함 보유량을 제한하는 조약에 서명하자 군부와 우익은 천황의 통수권을 침범했다고 맹렬히 공격했습니다. 하마구치는 그해 11월 도쿄역에서 우익 청년의 총에 맞았고 끝내 이듬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치인이 군부의 뜻을 거스르면 목숨이 위험하다는 공포가 이때부터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만주사변이 군부 폭주의 첫 신호탄이었습니다

1931년 9월 18일 만주에 주둔하던 일본 관동군이 철도를 스스로 폭파해 놓고 중국의 소행이라고 몰아붙이며 군사행동에 나섰습니다. 만주사변입니다. 도쿄의 정부는 사태를 확대하지 말라고 했지만 관동군은 듣지 않고 만주 전역을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허수아비 나라인 만주국을 세웠습니다.

여기서 일본 사회는 위험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정부의 뜻을 거스르고 일을 저질러도 처벌받기는커녕 영웅 대접을 받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신문은 연일 승전 소식을 퍼 날랐고 시민들은 환호했습니다. 군부는 자신감을 얻었고 청년 장교들은 국내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나라를 바꿀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현장에서 먼저 일을 저지르고 나중에 정부가 따라오게 만드는 방식이 성공 공식처럼 굳어진 것입니다. 이 공식은 훗날 중일전쟁이 번져 가는 과정에서도 반복되었습니다.

총리를 쏜 5.15 사건은 어떻게 가벼운 벌로 끝났을까요

1932년 5월 15일 해군 청년 장교 11명이 육군 사관후보생과 민간 우익 인사들과 함께 총리 관저로 쳐들어가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를 쏘아 숨지게 했습니다. 이누카이는 만주 문제를 두고 군부와 충돌하던 정당 정치인이었습니다. 이것이 5.15 사건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뒤였습니다. 군법회의에서 가해자들은 매우 가벼운 처벌만 받았고 언론은 곧 풀려날 것이라고 내다볼 정도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탄원서 11만 건도 이때 쏟아졌습니다. 법이 총리를 죽인 자들을 제대로 벌하지 못하자 정당 정치는 결정적으로 힘을 잃었습니다. 그 뒤 정당 총재가 아니라 퇴역 해군 대장이 총리를 맡는 내각이 들어섰고 일본의 정당 내각 시대는 사실상 막을 내렸습니다.

눈 내린 새벽 군대가 도쿄 한복판을 점령한 2.26 사건

1936년 2월 26일 새벽 도쿄에는 큰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육군 청년 장교들은 약 1500명에 가까운 병력을 이끌고 총리 관저와 주요 관청을 습격했습니다. 이 일로 전 총리 사이토 마코토와 재무대신을 지낸 다카하시 고레키요 그리고 교육총감 와타나베 조타로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다카하시는 군사 예산을 줄이려 했던 인물이어서 표적이 되었습니다.

오카다 게이스케 총리는 간신히 숨어서 목숨을 건졌지만 총리로 오인된 그의 처남이 대신 살해되었습니다. 반란군은 도쿄 중심부를 며칠 동안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변수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떠받들던 천황이 반란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히로히토 천황은 반란군을 진압하라고 직접 지시했고 반란군은 29일 투항했습니다. 주동자 19명이 총살형을 당했습니다.

당시 육군 안에는 크게 두 갈래의 세력이 있었습니다. 황도파는 정신력과 천황에 대한 충성을 앞세우며 소련과의 대결을 중요하게 보았고 통제파는 국가 전체를 전쟁에 쓰는 총력전 체제와 중국 대륙 진출을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2.26 사건을 일으킨 청년 장교들은 황도파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반란이 진압되자 권력의 저울은 통제파 쪽으로 기울었고 이것이 이후 일본이 중국과의 전면전으로 나아가는 길을 더 넓혀 주었습니다.

같은 시기 조선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요

일본 군부가 힘을 키울수록 식민지 조선에 대한 통제도 강해졌습니다. 만주사변 이후 조선은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쓰였고 1936년 8월에는 육군 대장 출신 미나미 지로가 총독으로 부임해 황국신민화 정책을 밀어붙였습니다. 같은 달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우승하자 동아일보가 가슴의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실어 정간을 당했습니다. 이어 신사참배 강요와 조선어 교육 축소가 이어졌습니다.

반란은 실패했는데 왜 군부는 이겼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기억할 교훈

2.26 사건은 군사적으로는 실패였고 청년 장교들을 따르던 황도파도 힘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군부 전체였습니다. 사건 직후 군 지도부는 숙군이라는 이름으로 반대파를 정리하고 질서를 잡은 척하며 정치에 대한 영향력을 오히려 키웠습니다. 1936년 5월에는 현역 군인만 군부대신을 맡을 수 있다는 규칙이 되살아나 군부는 내각을 쓰러뜨릴 수 있는 무기를 다시 손에 쥐었습니다. 정치인과 관료들은 또 총을 맞을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군부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그 뒤의 역사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1940년에는 정당을 모두 해산시켰으며 1941년 태평양 전쟁으로 치달았다가 1945년 패전을 맞았습니다. 일본 군국주의의 폭주는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폭력을 눈감아 준 사회와 허술한 제도 그리고 생활고가 낳은 분노가 겹쳐 생긴 결과였습니다. 폭력에 관대한 사회는 언제든 더 큰 폭력을 부릅니다. 일본 군국주의의 역사가 지금도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바로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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