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론 (Seikanron) 조선 정벌론은 어떻게 시작됐나, 사이고 다카모리가 목숨을 걸고 조선행을 자청한 진짜 이유

1873년 가을 도쿄의 정부 회의실에서 일본 최고의 영웅으로 불리던 한 남자가 자신을 조선에 사절로 보내 달라고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목숨을 잃을 각오까지 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이름은 사이고 다카모리였습니다. 이 장면이 바로 일본 정치사에서 가장 뜨거웠던 논쟁인 정한론의 한가운데입니다. 정한론은 말 그대로 조선을 정벌하자는 주장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일자리를 잃은 사무라이들의 분노와 권력 다툼 그리고 서둘러 근대 국가를 만들어야 했던 일본의 불안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오늘은 정한론이 어떻게 시작됐고 왜 끝내 무산됐는지 그리고 그 불씨가 이후 한반도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웠는지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칼을 빼앗긴 사무라이들의 나라에서 정한론은 왜 나왔을까요

정한론을 이해하려면 먼저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260년 넘게 이어진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새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일본은 서양 열강의 압박 속에서 하루빨리 강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위기감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양식 군대와 제도를 서둘러 들여왔고 1871년에는 각 지방의 번을 없애고 현을 두는 폐번치현까지 단행했습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들이 바로 사무라이였다는 점입니다. 막부를 무너뜨리는 데 앞장섰던 이들이 정작 새 세상에서는 신분과 안정적인 수입을 잃어 가고 있었습니다. 불만은 날이 갈수록 커졌고 정부는 이 분노를 어디로 돌릴지 고민해야 했습니다.

이때 눈에 들어온 곳이 바로 바다 건너 조선이었습니다. 사실 조선을 손에 넣어야 일본이 안전해진다는 생각은 막부 말기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 이미 퍼져 있었습니다. 요시다 쇼인 같은 인물이 대표적입니다. 여기에 국내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려는 정치적 계산이 더해지면서 정한론이라는 목소리가 점점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당시 사무라이들에게 칼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자신의 신분을 보여 주는 자존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징병제가 도입되어 평범한 농민도 군인이 될 수 있게 되자 사무라이는 더 이상 특별한 존재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들에게 정한론은 다시 칼을 들고 자신의 쓸모를 증명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처럼 보였습니다. 정한론이 단순한 외교 논쟁이 아니라 일본 사회 전체가 겪던 큰 변화의 한복판에서 터져 나온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일본이 보낸 편지를 조선이 받지 않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정한론의 직접적인 불씨는 편지 한 통이었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새 정권이 들어섰음을 알리는 외교 문서를 조선에 보냈는데 이를 서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서계에는 조선이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표현이 들어 있었습니다. 일본 군주를 가리키며 황과 칙이라는 글자를 쓴 것입니다.

당시 동아시아 질서에서 황제라는 호칭은 중국의 군주만 쓸 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조선 입장에서는 일본이 갑자기 자신을 중국과 같은 높이에 올려놓고 조선을 아래로 보는 듯한 문서를 보내온 셈이었습니다. 게다가 일본은 서양식 제도를 받아들이는 중이었기에 조선의 눈에는 전통을 버린 나라로 비치기도 했습니다.

당시 조선의 실권자였던 흥선대원군은 서양과 어울리는 나라와는 교류하지 않겠다는 쇄국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었습니다. 결국 서계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동래 왜관을 통한 협상도 계속 막혔습니다. 1873년에는 동래부에서 일본을 무법의 나라라고 부르는 글이 붙었다는 이야기가 일본에 전해지면서 일본 안에서는 이를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퍼졌습니다. 정한론자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명분이 생긴 셈이었습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왜 스스로 조선에 가겠다고 했을까요

1873년 8월 17일 일본 정부의 각의에서 사이고 다카모리를 조선에 사절로 보내는 안이 결정되었습니다. 사이고는 메이지 유신의 일등 공신이자 당시 정부의 실권자였습니다. 그는 병력을 보내기보다 먼저 자신이 직접 사절로 가서 담판을 짓겠다고 나섰습니다. 다만 최종 결정은 미국과 유럽을 돌고 있던 이와쿠라 도모미 일행이 돌아온 뒤에 내리기로 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사이고의 속마음입니다. 일본 안에서는 그가 조선에서 살해당하면 그것을 구실로 군대를 보낼 수 있다고 계산했다는 이야기가 오래 전해 내려왔습니다. 반면 요즘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정한론이 실제 조선 정복보다 일본 국내 정치 문제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불만에 찬 사무라이들을 달래고 흔들리는 정부의 중심을 잡으려는 시도였다는 것입니다.

사이고의 뜻에 힘을 보탠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에토 신페이 그리고 소에지마 다네오미 같은 인물들이 정한론의 편에 섰습니다. 이들은 지금 당장 조선의 문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부 안에서 큰 세력을 이루었습니다.

사이고가 이렇게까지 나선 데에는 사무라이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마음도 컸다고 전해집니다. 그는 고향 가고시마의 젊은이들에게 존경받는 지도자였고 이들의 앞날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한론은 한 사람의 야망이라기보다 일본 안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의 불안이 한 인물에게 모인 결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다만 그 방향이 이웃 나라를 향했다는 점에서 조선에게는 분명한 위협이었습니다.

이와쿠라 사절단이 돌아오자 하루아침에 판이 뒤집혔습니다

반전은 이와쿠라 사절단의 귀국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1871년 11월에 출발한 이와쿠라 사절단은 오쿠보 도시미치와 기도 다카요시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까지 포함한 대규모 사절단이었고 1년 9개월 동안 12개국을 둘러보고 돌아왔습니다.

서양의 발전한 모습을 직접 본 이들의 생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지금 일본에 필요한 것은 전쟁이 아니라 나라 안의 힘을 키우는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내치 우선론입니다. 재정도 군사력도 부족한 상태에서 조선과 전쟁을 벌였다가 러시아나 영국 같은 열강이 끼어들면 오히려 나라가 위험해진다고 본 것입니다.

1873년 가을 정부 안에서 격렬한 대립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이와쿠라 쪽의 뜻이 받아들여져 사이고의 조선 파견은 보류되었습니다. 이에 사이고를 비롯해 이타가키와 에토 등 정한파 인물들이 줄줄이 정부를 떠났고 이 사건을 메이지 6년 정변이라고 부릅니다.

그 뒤의 이야기도 극적입니다. 에토 신페이는 1874년 사가의 난을 일으켰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고향 가고시마로 내려간 사이고는 1877년 세이난 전쟁의 지도자가 되었고 패배 끝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조선 정벌을 외치던 영웅의 마지막은 일본 정부군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이 결과를 보면 정한론을 둘러싼 대립이 단순히 조선을 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만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이 앞으로 어떤 나라가 될 것인가라는 방향을 두고 벌어진 싸움이었고 그 선택은 결국 서양식 근대화를 먼저 이루자는 쪽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그 승리가 곧 평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같은 시기 조선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요

이 무렵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이끌던 쇄국 정책의 막바지에 있었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겪은 조선은 서양과 화친하지 않겠다는 뜻을 담은 척화비를 전국에 세웠습니다. 그러다 1873년 유학자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직접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일본에서 사이고가 물러난 해와 조선에서 대원군이 물러난 해가 같았다는 점이 눈길을 끕니다.

정한론이 남긴 질문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요

정한론은 무산되었지만 조선을 향한 일본의 시선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와쿠라와 오쿠보 같은 반대파도 조선 출병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시기가 이르다고 본 것에 가까웠습니다. 실제로 일본은 2년 뒤인 1875년 9월 군함 운요호를 강화도 앞바다에 보내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76년 조선은 일본의 압박 속에 강화도 조약을 맺고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정한론이 말로 하던 위협이었다면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은 그것이 현실이 된 장면이었던 셈입니다.

결국 정한론 논쟁에서 우리가 얻을 교훈은 분명합니다. 한 나라 안의 불안과 권력 다툼이 이웃 나라에 대한 침략 논리로 바뀔 수 있다는 점입니다. 또 당시 조선이 외부 변화를 읽고 대비할 시간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는 점도 아프게 다가옵니다. 정한론의 시작을 아는 일은 단순히 지난 일을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동아시아의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첫걸음이 됩니다. 이 글이 정한론을 처음 접하는 분들께 작은 길잡이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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