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쇼 데모크라시 (Taisho Democracy) 짧았던 일본의 자유주의 실험, 정당 정치와 보통선거는 왜 군국주의 앞에 무너졌을까

군국주의 국가로 알려진 일본에도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정치를 바꾸라고 외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내각이 시민의 시위 앞에 무너졌고 평민 출신 정치가가 총리가 되었으며 노동자와 여성도 자신들의 권리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짧고 눈부신 시기를 우리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이 자유의 시대는 오래가지 못했고 같은 일본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전쟁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오늘은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어떻게 시작되어 무엇을 이루었고 왜 한계에 부딪혔는지를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메이지가 끝나고 다이쇼가 시작되자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세상을 떠나고 다이쇼 천황이 즉위하면서 연호가 바뀌었습니다. 메이지 시대의 일본은 번벌이라 불리던 소수의 정치 집단이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사쓰마와 조슈 출신 정치가들이 군대와 정부의 중요한 자리를 나누어 가졌고 국민의 뜻을 대신하는 의회는 그 힘 앞에서 크게 제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있었습니다. 러일전쟁 이후 도시가 커지고 공장이 늘어나면서 교육을 받은 중산층과 노동자가 많아졌습니다. 신문과 잡지도 크게 늘어 사람들은 정치 문제를 스스로 읽고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성장한 시민들은 소수의 정치 집단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모습에 의문을 품게 되었고 이것이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키운 토양이 되었습니다.

세계의 흐름도 힘이 되었습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은 유럽 열강이 빠진 아시아 시장에서 수출을 크게 늘려 전례 없는 호황을 누렸습니다. 공장 노동자가 급격히 늘었고 대전 뒤에는 민주주의가 시대의 흐름이라는 분위기가 세계에 퍼졌습니다. 일본의 지식인들도 이 바람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번벌 정치를 무너뜨린 헌정옹호 운동은 어떻게 일어났을까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첫 불꽃은 1912년 말에 터졌습니다. 육군의 요구로 내각이 무너지자 번벌 출신 가쓰라 다로가 다시 총리 자리에 올랐고 이에 분노한 시민과 정치가와 언론인이 들고일어났습니다. 이들은 번벌을 무너뜨리고 헌법에 따른 정치를 지키자는 헌정옹호 운동을 벌였습니다.

도쿄에서는 시위대가 의회를 둘러쌌고 일부는 관청과 신문사를 습격할 만큼 분위기가 격렬했습니다. 결국 가쓰라 내각은 불과 두 달도 되지 못한 53일 만에 물러났습니다. 시민의 힘이 내각을 무너뜨린 일본 최초의 사례였습니다. 이 사건은 다이쇼 정변이라 불리며 정치는 소수가 아닌 국민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일본 사회에 퍼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구호는 벌족을 타파하고 헌정을 지키자는 것이었습니다. 정치가 소수의 방에서 이루어지던 시대가 서서히 끝나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시노 사쿠조의 민본주의는 어떤 생각이었을까요

이 시기를 이끈 대표적인 지식인이 도쿄제국대학 교수 요시노 사쿠조입니다. 그는 1916년 발표한 글에서 민본주의를 주장했습니다. 민본주의는 정치의 목적이 국민의 이익과 행복에 있어야 하고 정책을 결정할 때 국민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당시 일본 헌법은 주권이 천황에게 있다고 정해 두었기에 요시노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주권의 소재와는 별개로 정치가 국민을 위해 움직여야 한다는 점을 내세웠습니다. 헌법의 틀 안에서 가능한 길을 찾은 셈입니다. 같은 시기 미노베 다쓰키치는 천황도 국가의 한 기관이라는 천황기관설을 주장해 의회 정치의 이론적 바탕을 마련했습니다. 이 이론들은 정당 정치를 정당화하는 힘이 되었지만 훗날 군부와 우익의 공격을 받는 약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쌀 소동이 정부를 무너뜨리고 평민 총리가 등장했습니다

1918년 여름 일본 전역에서 쌀값이 치솟자 가난한 사람들의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도야마현의 어촌 여성들이 쌀을 싣고 나가는 배를 막아선 일을 계기로 시위가 전국으로 번졌고 수많은 도시와 농촌에서 쌀 가게와 부자들의 집이 습격당했습니다. 이 사건을 쌀 소동이라고 합니다.

정부는 군대까지 동원해 진압했지만 국민의 분노를 달래지 못했고 데라우치 내각은 결국 물러났습니다. 뒤를 이은 사람은 정당 정치가 하라 다카시였습니다. 그는 귀족이나 번벌 출신이 아니었기에 평민 재상이라 불리며 큰 기대를 모았습니다. 하라 내각은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정당 내각으로 평가받습니다. 다만 하라 총리는 1921년 도쿄역에서 청년에게 암살당했고 이는 정당 정치가 폭력의 위협에 얼마나 약했는지를 보여 주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노동자와 여성 그리고 차별받던 사람들도 목소리를 냈습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힘은 정치가들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들어 임금과 근로 조건을 개선하라고 요구했고 농민들도 소작 문제를 두고 목소리를 냈습니다. 1912년 스즈키 분지가 만든 우애회가 훗날 일본노동총동맹으로 성장하며 노동운동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메이데이 행사도 열렸고 파업도 크게 늘어 노동자의 권리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사회 문제가 되었습니다. 1920년에는 히라쓰카 라이초 등이 신부인협회를 만들어 여성의 정치 참여와 권리를 요구했고 그 결과 1922년 여성이 정치 집회에 참가하는 길이 일부 열렸습니다.

오랫동안 차별받아 온 부락민들도 1922년 전국수평사를 만들어 스스로 차별에 맞서 일어났습니다. 거리에서는 보통선거를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졌고 1925년 마침내 만 25세 이상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을 주는 보통선거법이 만들어졌습니다. 유권자는 이전보다 몇 배로 늘었습니다. 다만 여성에게는 아직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같은 시기 한국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일본이 자유를 이야기하던 때 조선은 식민 지배 아래 있었습니다. 1919년 도쿄 유학생들의 2월 8일 독립 선언에 이어 3월 1일 전국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고 4월에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습니다. 일본은 문화 통치를 내세웠지만 지배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고 1923년 관동대지진 때는 수많은 조선인이 학살당했습니다.

자유의 실험은 왜 짧게 끝났고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요

1925년은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빛과 그림자가 함께 나타난 해였습니다. 보통선거법과 같은 시기에 치안유지법도 만들어졌습니다. 천황제나 사유 재산 제도를 부정하는 운동을 처벌하는 법으로 처음에는 공산주의 운동을 겨냥했지만 점차 적용 범위가 넓어져 자유로운 사상과 운동 전반을 누르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자유를 넓히는 문과 좁히는 문이 동시에 열린 것입니다.

이후 일본의 정당 정치는 경제 불황과 부패에 대한 불신 속에 힘을 잃었습니다. 1932년 5월 15일 해군 청년 장교들이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를 암살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정당 내각의 시대는 사실상 막을 내렸고 군부가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또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식민지 조선과 타이완에는 그 혜택이 거의 닿지 않았다는 한계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일본 국민의 자유는 이웃 나라의 억압 위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요시노 사쿠조처럼 1919년 3월 1일 만세 운동 이후 조선인의 요구를 이해하려 한 지식인도 있었지만 이들은 소수였고 일본 사회 전체를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시기는 기억될 가치가 있습니다. 시민이 정치를 바꿀 수 있다는 경험과 약한 사람들의 권리를 이야기하던 용기는 전쟁 뒤 일본이 새 헌법을 만드는 바탕이 되었다고 평가됩니다. 민주주의는 한번 얻었다고 저절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며 약해지는 순간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교훈이 다이쇼 데모크라시에 담겨 있습니다. 이 글이 일본 근현대사를 다시 보는 작은 길잡이가 되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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