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독교인들은 정말 사라졌을까요 250년 만의 발견이 던진 질문
1865년 음력 3월 17일 양력으로는 4월 12일 나가사키의 새 성당 앞에 어른과 아이가 섞인 열댓 명이 섰습니다. 구경 온 마을 사람처럼 보였던 이들은 기도하던 프랑스인 신부에게 다가가 조용히 물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상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짧은 대화가 훗날 신도 발견이라고 불리는 사건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장면이 놀라운 이유는 당시 서양에서 일본의 가톨릭 신앙이 박해로 사라졌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나무위키는 일본 바깥에서 신앙이 진작에 절멸했으리라고 보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신부도 변변한 경전도 없이 두 세기 넘게 신앙을 이어 온 사람들이 제 발로 걸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제목의 질문에는 정정이 필요합니다. 일본 기독교인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숨었습니다. 물론 순교하거나 신앙을 버린 사람이 많았다는 사실도 함께 봐야 합니다. 이 글에서는 무엇이 박해를 불렀고 사람들은 어떻게 버텼으며 신앙이 다시 드러난 뒤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을 따라 살펴보겠습니다.
환영받던 기독교는 왜 위협으로 바뀌었고 26성인은 어떻게 순교했을까요
일본에 처음 들어온 그리스도교는 가톨릭이었고 16세기 중엽 포르투갈을 통해 전해져 규슈를 중심으로 퍼졌습니다.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 중에는 서양과의 무역 이익을 위해 포교를 허락하고 스스로 신자가 된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개종한 사람들을 일본에서는 기리시탄이라고 불렀습니다.
분위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기에 달라졌습니다. 한 해설은 히데요시가 다이묘들이 서양과 무역해 힘을 키워 자신에게 맞설 수 있다고 우려해 그 첨병으로 여긴 선교사를 겨냥했다고 설명합니다. 같은 해설은 일부 신자가 신사와 절을 훼손해 사회 문제를 일으킨 점도 언급합니다. 다만 이런 설명은 후대의 해석이므로 박해의 유일한 이유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1597년에 일어났습니다. 선교사 등 26명이 나가사키 니시자카 언덕에서 십자가형으로 처형되었고 그중에는 10대 소년도 있었으며 가장 어린 사람은 12세였다고 전해집니다. 이들은 1862년 교황청에서 성인으로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서는 금교 상태였기 때문에 이 소식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세계는 기억하는데 정작 일본에서는 잊혀 가던 사건이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1614년 금교령과 시마바라의 난은 신자들의 삶을 어떻게 바꿨을까요
도쿠가와 막부도 처음부터 금교 방침을 이어 갔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기독교가 불교나 신토와 마찰을 빚는다는 구실로 포교를 금지했다는 서술이 있고 1614년에 금교령이 내려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신자를 가려내는 제도가 뒤따랐습니다. 후미에는 예수나 성모의 상을 밟게 해 신자인지 확인하는 방식이었고 1629년부터 실시되었다고 합니다. 데라우케는 모든 백성이 어느 절에 소속되도록 하는 제도로 소개됩니다.
1637년에는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이 막부의 통치에 반발해 일으킨 난으로 알려져 있으며 영주의 폭정이 배경이었다는 서술도 함께 전해집니다. 난이 진압된 뒤 막부는 기리시탄을 정권을 뒤엎을 수 있는 세력으로 보고 더 철저히 색출했다고 설명됩니다. 가톨릭 계열 매체는 이 지역에 난에서 희생된 신자 3만 명의 유골이 묻혀 있다고 전하는데 이는 전승에 가까운 수치이므로 참고로만 보시기 바랍니다.
성직자의 길도 끊겼습니다. 외국인 선교사들은 순교하거나 신앙을 버렸고 일본인 사제도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나무위키는 마지막 일본인 사제 고니시 만쇼가 1644년에 순교한 뒤 개항 때까지 성직자가 없었다고 정리합니다. 1709년에 이탈리아 선교사 시도티가 몰래 들어왔지만 신자 공동체와 만나지 못한 채 붙잡혀 1714년에 옥사했다고 합니다. 배교한 선교사들의 이야기는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의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사제 한 명 없이 250년을 버틴 잠복 기리시탄은 어떻게 신앙을 지켰을까요
신자들은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신앙을 이어 갔습니다. 불교 신자처럼 행세하며 집 안에서 몰래 믿었고 성모상 대신 관음상처럼 생긴 마리아 관음상을 모셨다고 합니다. 여럿이 모이면 의심을 사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주로 가정 단위로 이어졌습니다. 사제가 없으니 가장이나 장남이 공동체의 어른인 초카타가 되어 가족에게 세례를 주고 예식을 이끌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놀라운 점은 정확도 높은 전례력을 만들어 주일과 성탄과 부활 같은 날을 챙겼다는 대목입니다.
기도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 라틴어 기도문을 소리 나는 대로 옮겨 염불처럼 외웠고 뜻은 잘 모른 채 전한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구전으로만 신앙을 넘기다 보니 오랜 세월 사이에 기도문의 발음과 전승이 달라졌다는 점은 인류학에서도 관심을 두는 연구 대상입니다.
물론 늘 안전했던 것은 아닙니다. 나무위키는 1790년과 1842년과 1856년에 우라카미 지역에서 신자 적발 사건이 있었다고 소개합니다. 1805년 아마쿠사에서는 육식 금지령을 어기고 소고기를 먹다가 신자들이 대량으로 발각되었는데 막부가 후미에와 배교 서약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는 서술도 있습니다. 어떤 해설은 막부가 신자들의 존재를 알면서도 큰 반란으로 번질 것을 우려해 눈감았다고 보지만 이 부분은 해석이므로 단정하지 않겠습니다.
1865년 오우라 천주당에서 신도 발견은 어떻게 일어났을까요
전환점은 개항이었습니다. 1858년 개항 조약 이후 외국인에 한해 신앙 활동이 허용되었고 나가사키에는 프랑스 신부들이 주도해 오우라 천주당이 세워졌습니다. 성당은 1864년에 완공되어 1865년 2월에 봉헌되었고 1597년의 26성인에게 바쳐졌으며 순교지 니시자카를 향해 지어졌습니다. 당시 일본 사람들은 이곳을 프랑스 절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날의 대화는 기록으로 전해집니다. 스기모토 유리라는 여성이 일행과 함께 성당에 들어와 프티장 신부에게 세 가지를 물었다고 합니다. 성모 마리아를 공경하는지 물었고 결혼했는지 물었고 지금은 슬픈 시간을 지키고 있는데 신부도 지키는지 물었습니다. 신부가 성모를 공경하고 사제는 결혼하지 않으며 전례력을 지킨다고 답하자 그제야 우리의 마음도 신부님과 같다고 속삭이며 성모상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고 합니다. 성모상 앞에서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는 장면은 지금도 오우라 천주당에 조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신자들 사이에는 일곱 세대가 지나면 바다 건너 신부가 온다는 예언 같은 전승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그들이 신부를 알아본 배경으로 소개되지만 사적인 전승이므로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공동체의 기억으로 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서양의 신부들이 이 소식을 기적이라고까지 부르며 감격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습니다.
신도 발견 뒤에도 박해가 이어졌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드러난 뒤가 곧바로 자유는 아니었습니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1867년에 우라카미 지역 신자들이 불교식 장례를 거부하면서 존재가 막부에 알려졌고 신자 68명이 체포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어 들어선 메이지 정부도 처음에는 금교 정책을 거두지 않았고 우라카미 신자들을 여러 지방으로 유배 보냈습니다. 같은 문서는 유배된 3394명 가운데 662명이 순교했다고 전합니다. 이 수치는 하나의 백과사전식 서술이라 정확한 인원은 다른 자료로 재확인이 필요합니다.
국제 사회의 압력이 상황을 바꿨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서구 열강이 신자 탄압을 멈추지 않으면 조약 개정에 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이자 신정부가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는 해석입니다. 결국 1873년에 신자들이 풀려나고 금교령이 해제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가톨릭 계열 기록은 처음 신앙이 전해진 뒤 1873년까지 30만 명이 넘는 신자가 순교하거나 박해받았다고 소개하지만 이 역시 추정치입니다.
금교령이 풀린 뒤 잠복 기리시탄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그리고 오늘날 무엇이 남았을까요
금교령이 풀렸다고 모두가 바로 성당으로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가톨릭 신문의 특집은 언제 다시 박해가 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신자들이 쉽게 가톨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고 전합니다. 대부분은 결국 가톨릭 교회로 돌아왔지만 조상들이 전한 신앙이 가톨릭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레키리시탄으로 불리며 자기 방식의 신앙을 이어 갔습니다.
그 흔적은 생각보다 오래 남았습니다. 한때는 이들이 1980년대에 모두 사라졌다고 알려졌지만 1991년에 인류학자가 나가사키현 고토에서 아직 존재함을 확인했다는 서술이 있습니다. 다만 젊은 세대가 떠나 앞날은 밝지 않다고 전해집니다. 세례명만 간직한 채 신앙의 대가 끊긴 사람의 이야기도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2018년에는 나가사키와 아마쿠사 지방의 잠복 기리시탄 관련 유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랐습니다.
정리하면 일본 기독교인들이 사라진 이유를 박해 하나로 답하기는 어렵습니다. 순교와 배교로 많은 이가 희생되었지만 남은 사람들은 숨어서 신앙을 이어 갔고 개항과 외교 압력이라는 바깥의 변화가 그들을 다시 세상 밖으로 불러냈습니다. 신앙을 지킨 사람들의 선택은 존중하되 이 역사가 종교 탄압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 주는 사례라는 점을 함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250년을 버틴 이 이야기에서 무엇이 가장 인상 깊으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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